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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화

세기의 미남배우 알랭들롱 안락사 결정

by 아이루스 2022.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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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들롱 태양은 가득히 라는 영화가 생각나는 미남 배우
알랭들롱 세기의 미남 배우였던 그도 세월 앞에 어쩔 수 없었나 보다

2019년 8월, 뇌졸중으로 입원해 수술을 받았고 회복하여 퇴원하였다. 2021년 초 딸 아누슈카 들롱이 알린 바에 의하면 건강히 지낸다는 듯. 은퇴 영화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늘 2022년 3월 19일 그의 아들 앙토니 들롱이 부친께서 안락사를 결정하셨다고 발표했다.

알랭들롱 위키백과

알랭들롱의 생애와 그가 출연한 영화 등도 알아보자


알랭들롱 프랑스의 배우.

장폴 벨몽도, 카트린 드뇌브, 잔느 모로, 장루이 트랭티냥과 함께 1960년대 프랑스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배우들 중 하나로 프랑스 밖에서도 인지도는 상당하며 이탈리아 영화사에도 중요한 배우로 기록된다. 일본과 한국에서도 그의 작품들은 인기를 끌었고 미남의 대명사로 남아있다. 정작 가장 큰 시장인 미국에서는 대중적으로 흥했다고 불릴 수 있는 작품이 없었으며, 영어를 열심히 배워가며 시도했던 미국 진출에 실패하여 미국 내 인지도는 떨어진다. 그래서 미국 영화 매체에서 굳이 쟁쟁한 할리우드 고전 배우들을 제치고 알랭 들롱을 전설적인 배우라고 거론하진 않는다.

알랭 들롱은 미국 진출 실패 이후 프랑스로 복귀하고는 할리우드를 비판하기도 했다.

생애
1935년 11월 8일 프랑스 오드센 주 소에서 태어났다. 4살 때 부모가 이혼했고, 재혼한 어머니와 살았으나 계부와 잦은 갈등을 빚었다. 유복하지 못했던 유년기 때문인지 가톨릭 학교를 다녔지만 행실 불량으로 여러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개중에는 신학에 대한 들롱의 적성을 알아본 교사들이 들롱에게 사제직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들롱은 14살에 학교를 떠나 짧은 기간 동안 계부의 정육점에서 일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파병 당시 사이공 해군기지 경비중대 무전병으로 복무 중인 사진. 가장 중앙에 앉은 젊은 군인이 알랭 들롱이다. 17세에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해군 통신학교 기간병으로 근무 중 절도죄로 불명예 전역과 군 복무 연장의 선택에 놓이자 복무 연장을 택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인 1953~54년에는 베트남 사이공 해군기지 경비중대 무전병으로 1년간 파병되었다. 파병 기간 중 부대 지프를 훔쳐 근무지를 무단이탈하여 영외로 여행을 떠났다가 운전 미숙으로 차량을 강물에 빠뜨린 혐의로 체포되어 11개월간 군 교도소 수감 후 해군 상병(Matelot de 1re classe)을 끝으로 해군에서 불명예 전역했다. 들롱은 군에서 수감 기간 포함 총 4년간 복무했다.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한 외인부대의 낙하산 부대원 역할을 연기한 적이 있어 실제로 전쟁에 참전한 외인부대 낙하산병이나 해군 특공대 출신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퍼져 있기도 했지만, 실은 위에 나오듯 해군 육전부대인 Fusiliers marins 출신.

불명예 제대 후 세계 각지를 떠돌다 1956년 프랑스로 돌아온 들롱은 돈을 벌기 위해 파리에서 웨이터, 짐꾼, 비서, 점원 등 갖은 잡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4] 이때 여배우 브리지트 오버와 친분을 쌓았고 이후 오버와 함께 칸 영화제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미국의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1902~1965)에게 발탁되었다.

스크린 테스트 후 셀즈닉은 들롱에게 영어 교육을 제공하고 계약을 제안했다. 하지만 파리로 돌아온 들롱은 프랑스의 이브 알레그레 감독을 만나 고국에서 경력을 쌓으라는 충고를 받아들이고 셀즈닉과의 계약을 파기한 후 알레그레 감독의 영화 1957년 <여자가 다가올 때>로 데뷔했다.이후 <사랑은 오직 한 길>, <아가씨 손길을 부드럽게> 등의 로맨스 영화를 통해 인기를 얻고, 공전의 히트작 <태양은 가득히>로 세계적인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 이후에도 수없이 리메이크된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은 위험한 남자 "톰 리플리" 역을 맡아 다부진 몸과 매혹적인 눈빛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알랭 들롱의 이름값 때문에 소개돼서 히트친 영화도 있을 정도였다.

다만 연기력에 대해선 의견이 갈리는 편인데 입이 떡 벌어질만한 거장 감독들의 작품들로 꽉 채워진 필모그래피인데도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적은 없다. 동시대 알랭 들롱과 함께 활동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스타들이 상을 휩쓸었던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수상 실적은 저조하고 본국인 프랑스의 대표적 시상식인 세자르에서도 전성기가 지난 뒤 중년의 나이에 남우주연상을 1회 수상한 것이 전부. 현대에 와서는 연기력이 저평가되었다고 재평가하는 의견이 있긴 하다.


서늘하면서 퇴폐적인 특유의 매력으로 이후에는 주로 느와르에 출연했으며 독보적으로 빼어난 외모로 "프렌치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푹 눌러쓴 중절모, 깃을 세운 트렌치 코트를 입고 범죄자를 주로 연기했으며 이런 모습은 <한밤의 암살자>, <시실리안>, <암흑가의 두 사람>, <암흑가의 세 사람>, <볼사리노>, <고독한 추적> 등에서 볼 수 있다. 워낙 범죄자나 악역을 많이 맡다 보니 죽는 역할도 꽤 많다. 위 느와르 영화만으로 사망전대 멤버.

아마 어렸을 적 질풍노도의 시기 때문인지 들롱은 하류인생을 주로 연기했는데 실제로 젊은 시절 많은 굴곡을 경험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 일본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책에 "알랭 들롱은 미남이다. 그러나 왠지 풍기는 분위기가 천하다. 그런 만큼 밑바닥 인생을 연기하면 매력이 살아난다"라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이후 1998년 <절반의 기회>를 끝으로 "프랑스 영화는 죽었다"고 선언한 들롱은 영화 출연보다는 영화 제작과 복싱 프로모터로 더 활약했다.

1991년에 영화 <카사노바>에서 나이가 든 자코모 카사노바 역을 맡았는데 당시 최고 개런티급인 7백만 프랑을 받았다. 이를 두고 프랑스 언론은 한물간 배우에게 무지막지한 개런티를 들인다며 제작자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흥행 역시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1999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하여 현재는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당시 로망드 TV에 출연하여 귀화 및 이민 동기를 밝혔는데 스위스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은 재산 보호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부와 프랑스 사회 전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8년에 <아스테릭스 : 미션 올림픽 게임>에서 백발이 성성한 시저 역으로 오랜만에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었다.

2017년 5월 9일(현지시간) 영화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2019년 칸 영화제에서 공로상 격인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용납 가능한 범주를 넘은 막장 사생활로 인해 수상 반대 여론이 거세다. 온라인에서 수상을 철회하라는 청원에 2만 5천명 이상이 서명했으나 2017년 5월 19일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시상자는 그의 딸 아누슈카 들롱. 알랭 들롱은 "인생의 끝에 다다랐다고 느끼는 요즘이라 사후에 받을 상을 지금 받는 것 같다"며 드물게 눈물을 보였다.

2019년 8월, 뇌졸중으로 입원해 수술을 받았고 현재 회복하여 퇴원하였다. 2021년 초 딸 아누슈카 들롱이 알린 바에 의하면 건강히 지낸다는 듯. 은퇴 영화를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7]

2022년 3월 19일 그의 아들 앙토니 들롱이 부친께서 안락사를 결정하셨다고 발표했다.


알랭들롱 스캔들
대표적인 사례는 교제 당시 '유럽의 약혼자들'로 불렸던 독일 출신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와의 관계. 1958년 들롱은 영화 <사랑은 오직 한 길>에서 호흡을 맞춘 독일 영화계의 스타 히로인 로미 슈나이더와 사랑에 빠져 약혼했지만, 5년 여의 연애 끝에 후술할 니코와 아이의 등장으로 1963년 결별했다. 알랭 들롱의 말로는 이것이 그의 진정한 첫사랑이었다고. 둘은 결별 이후로도 함께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로미가 사망하기 전까지 가까운 친구 사이로 지냈고, 로미의 사후에도 알랭은 로미 관련 행사에는 늘 기꺼이 참석해 단순한 이성 감정을 뛰어넘은 사랑을 보여주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객원 멤버였던 니코와 외도해 1962년 태어난 실질적인 장남 크리스티앙 아론(아리)이 있다. 그러나 알랭 들롱은 친자 인정 소송에도 불구, 현재까지도 아론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이들의 얼굴을 비교해놓은 샷들을 보면 상당히 많이 닮았는데 알랭 들롱은 끝까지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 확인 소송에서 친자가 아니라고 인정받았다는데 어떻게 인정받았는지 불가사의할 정도. 심지어 들롱 부모마저도 친자식으로 인정해서 마약 중독이던 니코 대신 아리를 키워주기까지 했지만 어쨌든 들롱의 성을 물려받지 못했다.

1964년부터 1969년까지의 짧지만 유일한 결혼생활 끝에 이혼한 부인 나탈리 들롱[8]과의 사이에 공식적인 첫 아들 안소니 들롱이 있다. 할리우드에서 일하지만 부모의 명성에 비해 인지도나 인기는 그저 그런 정도. 대신 앙토니 들롱의 딸인 앨리슨 르 보르게스가 알랭 들롱과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 딸은 앙토니 들롱의 질풍노도 시절 생긴 사생아이며, 할머니 나탈리 들롱의 젊은 시절 판박이에 가깝다.

가장 오래 사귀었으며 알랭 들롱이 가장 사랑했다고 말한 여인은 나탈리와의 이혼 후 약 15년 간 관계를 지속한 끝에 1982년 결별한 미레유 다르크. 결별 원인으로는 미레유의 지병 때문에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고. 미레유와도 역시 결별 후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2017년 그녀가 사망하자 알랭 들롱은 굉장히 상심했다.

배우로 데뷔하기 전인 1950년대에는 "Paroles Paroles"를 함께 불렀던 가수 달리다와도 사귀었었다고 밝혔으며, 브리지트 바르도와도 염문이 있었지만 알랭 들롱이 직접 그녀와는 단지 절친한 사이일 뿐이고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루머를 부정했다.

1987년부터는 21살이었던 네덜란드의 모델 로잘리 판브레멘과 15년 가량 동거했는데 그 사이에서 낳은 딸 아누슈카 들롱과 아들 알랭 파비앙 들롱이 있다. 알랭 파비앙 들롱은 배우로 프랑스 연예계에서 활동 중이다.

비판
그는 '나쁜 남자' 기믹으로 유명하지만, 문제는 그게 기믹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나쁜 남자라는 점이다.

가정폭력범으로 파트너였던 30살 연하의[9] 로잘리 반 브레멘을 폭행해 갈비뼈와 코뼈를 부러트린 일이 공개되어 크게 비난받았다. 이 사실을 폭로한 아들 알랭파비앙 들롱은 사실 어머니 로잘리도 잔인했고 폭력적이었기에 당시 '당해도 싸다'는 심정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다른 아들인 앙토니 들롱을 어릴 때 개 우리에 가두기도 했다고 한다.

자기 포장과 언플에 능수능란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탈세 혐의 등으로 비난받으면서도 자신을 3인칭으로 칭하면서 '그는~', '알랭 들롱은~' 등으로 자신을 부르며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내 자기 자신을 변호한다.

1960년대에는 경호원 살인 사건(마르코빅 사건)의 용의자로 불려다니면서도 미디어와 공화국 대통령을 상대로 편지를 보내 거창한 말로 자신이 무죄임을 항변한 바 있다. 사건 당시 영화를 찍고 있었다던 들롱의 증언과, 막판에 결정적인 증거 부족과 함께 사건에 연계된 권력층 때문에 알랭은 7년 간의 공판 끝에 결국 무죄로 판명이 났으나 살해당한 경호원이 남긴 편지[10]와 구속 직전까지 고려했던 강도 높은 수사가 진행됐을 정도로 들롱은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종결 후에도 마피아의 압력으로 경찰이 수사를 중단했다는 등의 무수한 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이 계속되는 스캔들과 사건에 대한 연루 덕분에 들롱은 프랑스 언론의 도마에 자주 오르내렸다. 한국 방문[11] 시기 프랑스 언론은 그에 대해 '아시아 방문하러 간다는데 거기서는 어떤 싸가지로 욕 먹나 봅시다.', '역시나 알랭 들롱의 행실은 유럽 밖에서도 돋보였습니다. 자기가 황제인 줄 알았다네요.'라고 보도하는 등 호의적이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1992년 동아일보에서는 들롱을 '세련된 용모와 매너를 겸비한 배우'라고 보도한 바 있다. 당시 통역을 맡은 이다도시의 책에 따르면, 그놈의 성질머리 때문에 사람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이다도시에게 같은 나라 사람이니 좀 진정시켜봐라고 하기에 냅다 '나 한국 사람인데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혼자 발광하다가 이다도시에게 사랑 때문에 한국에 왔냐면서 분을 풀었다고 한다. 참고로 들롱이 연기한 역할 중에 실제 알랭 들롱의 성격과 가장 닮은 캐릭터는 야망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냉혹한 청년 '톰 리플리'라고.

정치적으로는 극우 성향으로 장 마리 르펜의 지지자 겸 친구이다. 그는 "국민전선 마린 르펜 대표와 그의 아버지가 그동안 홀로 싸워왔는데 이제 처음으로 그들이 혼자가 아니다. 그들은 프랑스인과 함께 있다"고 말하며 부녀를 지지하였다. 황당한 점은, 알랭 들롱은 비시 프랑스 정권의 홀로코스트 동조 만행을 고발하는 영화인 미스터 클라인(고독한 추적)을 주연 배우 겸 제작자로 찍은바 있는데, 르펜이 속한 국민전선은 비시 프랑스를 우상화 했었다는 점이다.(...) 미스터 클라인은 벨디브 사건을 다뤘는데, 마린 르펜은 벨디스 사건에 대해서도 망언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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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한 영화

개봉연도
제목
배역 이름
비고
1957
여자가 다가올 때
주연
1958
사랑은 오직 한 길
프란츠 로브하이너
주연
살며시 안아주세요
루루
주연
1960
톰 리플리
주연
로코와 그의 형제들
로코 파론디
주연
1961
더 조이 오브 리빙
울리세 체코나토
주연
1962
프랑스식 십계
필립 알랑
주연
태양은 외로워
피에로
주연
1963
레오파드
탄크레디 팔코네리
주연
지하실의 멜로디
프란시스
주연
1964
위기탈출
마르크
주연
노란 롤스로이스
스테파노
주연
검은 튤립
기욤 / 줄리앙
주연
1965
원스 어 씨프
에디
주연
1966
강 건너 텍사스
돈 안드레아 발다사르
주연
로스트 코맨드
필리페 에스클라비에
주연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쟈크 샤반-델마스
주연
1967
악마 같은 당신들
피에르 라그랑쥬 / 조르주 캉포
주연
제프 코스텔로
주연
대모험
마뉘
주연
1968
아듀 라미
디노 바령
주연
죽음의 영혼
윌리엄 윌슨
주연
다니엘
주연
1969
시실리안
로저 싸르테
주연
수영장
장폴
주연
1970
애정의 미로
시몬
주연
볼사리노
로시 시프레디
주연
코리
주연
1971
미망인
장 라비뉴
주연
레드 선
갓치 ‘고쉬’ 킨크
주연
1972
트로츠키 암살
프랭크 잭슨
주연
인디안 썸머
다니엘 도미니치
주연
에두아르 콜망
주연
1973
빅 건
토니 아르젠타
주연
스콜피오
로리에르
주연
암흑가의 두 사람
지노
주연
1974
볼사리노 2
로니 시프레디
주연
1975
르 지땅
위고 세나르
주연
형사 이야기
슈카스
주연
엘 조로
주연
1976
부메랑
쟈크
주연
미스터 클라인
로베르 클라인
주연
1977
비밀 수첩
 
주연
1979
에어포트 79
주연
야전병원
장 마리 데스프리
주연
1980
테헤란 43
파치
주연
세 번째 희생자
미셸 제르포
주연
1981
형사 이야기
초우카스
주연
1982
암살자
마틴 테리어
주연
1983
최후의 방어선
쟈크
주연
1984
스완의 사랑
바론 드 샬루스
주연
우리들의 이야기
로베르 아브랑슈
주연
1985
핫 블러드
다니엘 프라트
주연
1986
페세지
장 디아즈
주연
1988
분노는 오렌지처럼 파랗다
유진 그렝델
주연
1990
댄싱 머신
알란 볼프
주연
누벨 바그
루이 / 로저 레녹스 / 리차드 레녹스
주연
1992
카사노바
카사노바
주연
1997
낮과 밤
알렉상드르
주연
1998
하프 어 찬스
줄리앙 비냘
주연
2000
배우들
본인
주연
2002
루키노 비스콘티 백작의 시간들
본인
출연
2009
아스테릭스: 미션 올림픽게임
시저
주연
2012
해피 뉴 이어, 엄마!
본인
출연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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