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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뉴스 정보

소현세자

by 아이루스 2022.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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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의 장남.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의 친형이며 전주 이씨 소현세자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612년 선조의 5남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훗날 인조)과,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 한씨(훗날 인열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청성현부인 한씨는 비록 전주 이씨는 아니었지만, 부모님 양쪽으로 효령대군의 핏줄을 받았고, 남편인 능양군과는 태종을 공통조상으로 두었다. 즉 소현세자와 그의 동생들은 양쪽 부모로부터 전주 이씨 왕족의 피를 받은 로열 패밀리였던 셈이다. 능양군은 본디 지금의 경희궁 터인 아버지 정원군의 집에서 살다가 16세에 한살 위인 한씨와 혼인한 후, 경행방 향교동 사저로 분가해, 2년 뒤 장남 소현세자를 낳았다. 소현세자의 본명 이왕(李𣳫)은 공문서등에 사용되었던 이름이고, 실제 그가 사저에서 12세까지 살 때, 어떤 아명으로 불리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많은 왕족이 10살이 되기 전 군호를 받지만, 소현세자의 경우 12살이 되도록 군호를 받은 적도 없다. 그저 광해군 치세 하에서 소외된, 혹은 견제받는 왕실 가족으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 정원군은 이복형인 광해군과 원수지간이었다. 소현세자가 6살 되던 해인 1617년, 그의 할아버지 정원군은 당시 왕 광해군에게 집을 빼앗겼다. 정원군의 집터에 왕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술사에 말에 광해군이 집을 빼앗고 그 자리에 경덕궁(지금의 경희궁)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해 전에, 아끼던 막내아들 능창군(소현세자에겐 막내삼촌)을 이복형 광해군 손에 참혹하게 잃었던 정원군은 집까지 뺏긴 뒤 울화병이 생겨 술만 처마시다가 결국 소현세자가 8살 되던 1619년 세상을 떴다. 이후 소현세자의 아버지 능양군은 제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를 하겠다 천명했으며 실제로 4년 후, 반정에 성공해 인조로 즉위하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비록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그의 설움을 직접 체험하진 않았겠지만, 반정 모의를 하는 아버지를 두고, 밑으로는 일곱살 넘게 터울지는 동생들[3]을 둔 맞아들로서, 반정이 성공할 때까지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12살이 되던 해인 1623년, 아버지 능양군은 반정에 성공했다. 아버지가 인조로 즉위함으로서, 소현세자도 하루 아침에 원자가 되었다. 처음엔 창경궁에 머물렀지만,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이 타 버리자, 아버지 인조는 할아버지의 옛집이기도 했던 경덕궁(지금의 경희궁)으로 이어했으며, 원자였던 소현세자는 경덕궁 동궁의 첫 주인이 되었다. 광해군은 소현세자 할아버지 집을 빼앗아갔다가, 그 자리에 엄청 좋은 새 집만 지어준 셈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625년 1월 21일, 원자는 경덕궁(지금의 경희궁) 융정전에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4] 그리고 14살에 결혼할 뻔하다가 파토가 난다. 최종 간택에서 소현세자보다 한 살 어린 13살 윤의립의 딸이 간택되었다. 하지만 윤의립의 친척이 한 해 전에 있었던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고 대신들이 극구 반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인조의 지지세력이고 반정공신들이기도 한 서인들이, 남인인 윤의립의 딸을 탐탁찮아 했던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아무튼 소현세자와의 혼인이 확정되었다가 파혼당한 윤씨 소녀는 낙담해서 자결했다 하는데, 진위는 불분명하다. 자결한 소녀 이야기는, 2년 후, 소현세자가 한살 연상의 강빈과 혼인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서 1636년 첫 아들 원손이 태어나기 전까지 9년간 아이가 안 태어난 이유로 일부 창작물에서 상상되어지기도 했다. 소현세자가 자신 때문에 죽은 윤의립의 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강빈을 오랫동안 냉대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승정원일기와 동궁일기가 번역되기 전 벌어진 고증 오류로, 소현세자와 강빈은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첫 아들 이석철이 태어나기 전에도, 두 명의 딸을 두는 무난한 어린 부부의 모습을 보였다. 그중 첫 딸은 결혼한 지 1년 만인 1628년 12월[5] 태어났다. 따라서 실제 기록만으론 소현세자가 초기에 강빈을 냉대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설령 소현세자가 정말로 창작자들의 상상처럼 윤의립의 딸에게 죄의식을 느꼈다 한들, 길어야 2달 만에 강빈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

아무튼 왕세자가 되고, 혼인하려다 파혼한 뒤, 2년이 지난 후, 정묘호란이 발발했다. 이괄의 난으로 북도 방어력이 극히 약화된 상황에서 능한산성(凌漢山城)[6]까지 후금군에게 빼앗기자 인조는 분조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고 사헌부에서는 도성을 버리지 말고 근왕군을 이끌어 막자고 주장했으나 인조 자신은 "논한 것들이 실질성이 없다(所論, 太半失實矣)"고 답하고는 자신은 강도(江都)로 향하고 세자는 분조[7]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게 했다. 당시 열 여섯살이었던 소현세자는 분조를 훌륭하게 이끈 것으로 기록된다.

전란이 끝난 1627년 말 강석기의 차녀와 가례를 올리게 된다. 이 시기의 기록물로 <소현동궁일기(昭顯東宮日記)>와 <소현분조일기(昭顯分朝日記)>가 있는데 당시 조선의 군 체계와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侍講院)이 사용한 교재 및 교육 체계 등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시강원 스승들의 눈으로 본 소현세자의 공적 영역의 생활상에 대해 알 수 있다.

정묘호란이 끝난 직후 시강원은 소현세자에게 엄청난 양의 공부를 시켰는데 1628년에 있었던 조강례(朝講禮)[9]에서 소현세자가 강학한 책을 30번 읽는다고 하자 좌빈객[10]이었던 김상용이 "100번을 읽어야 그 뜻을 통달한다"고 답했고 1629년 조강례에서는 소현세자가 새로 배운 건 30번, 예전에 배운 건 20번 정도 읽는다고 하자 우부빈객 장유가 "읽는 양을 2배로 늘리라"고 했다. 같은 해 회강례(會講禮)[11]에서는 김류가 민간의 선비들은 하루에 읽는 횟수가 기본 100회이고 70회 밑으로 내려가지 않으니 그러니 "새로 배운 것은 60번, 전에 배운 것은 40번 읽으라"고 진언했는데 하루에 100번씩 읽는게 당시 세자의 기본 학습이었던 셈이었다.

소현세자는, 다음날 내일은 주강과 석강을 하겠다, 혹은 주강만 하겠다는 식으로 표면적으론 다음날 자기 공부 스케줄을 정할 수 있었다. 당일에 취소할 수도 있었고, 공식 행사가 있으면, 스승들이 먼저 취소시키기도 했다. 각종 행사 뿐 아니라 심지어 죄인들이 형벌을 받는 날도 휴일이어서, 수업을 통째로 쉬는 날은 은근히 많았다. 하지만 앞서 서술되었듯, 한번 나갔던 수업 진도는 그만큼 되풀이 암기하며 복습을 해야 했던 데다, 별다른 이유없이 수업을 빼먹는 일은 눈치 보여서라도 어려웠던 거로 보인다.
2.2. 청나라로 끌려가다[편집]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여진족의 나라 청나라에게 치욕적으로 패배하면서 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의 심양(묵던)(Mukden, 현재의 랴오닝성 선양시)으로 끌려갔다. 소현세자가 포로로서 묵던으로 이동할 때 시강원 인원만 300명 정도가 동행했고 정축하성(삼전도의 굴욕) 이후 인조는 세자가 북으로 억지로 끌려간 탓에 시강원과 동궁의 호위를 맡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대폭 줄였다.[12]

청나라로 간 소현세자는 고관[13]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쌓아나갔고 그를 통해 얻은 고급 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대비하게 하기도 했다.[14] 인질로 있으며 좌절하지 않고 아내 강빈의 권유로 묵던 근처에 농장을 만들고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 시장에서 구출해내서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니 세자의 거처가 마치 시장과도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재물을 얻어 청나라 관료들과의 교류와 심양관 운영에 쓰였다.

청나라 측에서는 툭하면 세자에게 외교적 현안, 특히 명나라와의 밀교 등에 대한 것을 따져 묻고는 했는데 그 때마다 세자는 마치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이 능숙하게 답변하곤 했다고 한다. 유명한 일화로 청 장수 용골대가 세자를 윽박지르자 "나는 타국에 있지만 일국의 세자인데 어찌 이리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렸으니 이런 식으로 협박하지 말라."라고 조용히 반론한 적이 있다. 세자인 데다 포로 입장에서 저렇게 점잖게 반박한거지, 쉽게 말하면 "내가 한 나라의 왕자인데 고작 네까짓 장교한테 그 따위 소리를 들을 위치가 아니다. 꼬우면 죽여라"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15] 횡의 사건[16] 때는 도르곤 등을 찾아 평안감사, 선사포첨사, 의주부윤, 예조참판 등 청나라에 끌려 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이 붙은 채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최선을 다 했다.


2.3. 아버지와의 갈등
하지만 이러한 소현세자의 행보는 점점 아버지 인조의 견제를 사게 되었다.

인조는 청나라의 침입을 막지 못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한 나라의 군주라는 사람이 오랑캐에게 굴복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망신을 당해 권위가 바닥을 쳤고, 수십만명의 조선 백성들을 포로로 끌려가게 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인조는 청에 대한 반감을 끈덕지게 고수하며, 현실성 없는 복수라도 그것을 기치로 내걸었다. 박씨전 에 반영되었듯 당시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이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적개심으로 대동단결한 민심에 편승하는 것이, 패전이라는 엄청난 실책을 저지른 인조 자신의, 조선 내에서의 권위를 부지하는 안전한 길이었다. 실제로도 청나라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삼고 있음을 끊임없이 인조에게 상기시키며인조를 협박해 오는 마당에, 이런 상황에서 인조가 청에 대해 증오심 외에 다른 감정을 품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소현세자 역시 환경만 보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반청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청나라로부터 받은 목숨에 대한 위협이나 굴욕적인 대우는 조선 구중궁궐에 남은 인조보다,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직접 받은 게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조선에서 끌려온 자신의 신하들이 코 앞에서 참수되는 것도 보았으니까. 인조와 소현세자의 결정적 차이는 이를 계기로 소현세자는 좀 더 상황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볼 줄 알게 되었단 것이다. 소현세자는 굴욕감에 이만 갈거나, 자포자기하거나, 장렬히 시들어버리는 대신, 당시 한창 국운이 상승중이고 영웅이 많던 건강한 청나라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혐오하고 멸시하는 기존의 조선식 사고에서 벗어났기에, 청나라와 조선 양쪽의 팽팽한 갈등을 조율하면서도, 조선인들을 보호하고 실익을 추구하는 훌륭한 외교활동을 수행하는 게 가능했다. 오죽하면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이 "조선 왕을 끌어내고 세자를 세웠으면 나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을까.

인조와 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둘다 자신의 중대한 실정으로 권위에 위협을 느끼고, 그 결과 잘나가는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를 정적으로 간주해 억압하려 한 공통점이 있다. 다만 선조의 경우엔 문제가 더 심각했을 수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실정을 저지른 선조에게, 권위에 대한 위협은 현실적이었다. 재야 사림이나 조정 중신들은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했다. 이 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차기 왕으로 지목한게 세자 광해군이었고, 임진왜란 이후 집권 여당 역시 광해군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이런 상황에 폐위될 위기감을 느낀 선조는 왕 노릇을 계속하기 위해[18] 분조를 이끄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아들 광해군을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濁小北)을 부풀려 키워, 광해군을 몰아내고 견제하려 하다가, 결국 자신의 사후 아홉살밖에 안된 어린 영창대군이 이복형 광해군 손에 의해 증살당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아무튼 선조가 받은 위협은 꽤 실질적이고 결정적이었다. 그를 공격한 것은 내부의 정치 권력이었고, 이는 달리 말하자면 선조의 내적 지지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라는 의미였다. 또 선조를 폐위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단순 공갈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다시말해 선조는 먼저 광해군을 공격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실제로 자신이 공격당할 것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인조의 상황은 좀 달랐다. 비록 청나라로부터 왕권 교체 위협을 받을지언정, 인조의 조선 내에서의 지지기반은 탄탄했다. 또한 당시 청나라가 인조를 협박한다 해도, 말 뿐이었지, 실제로 청나라의 행보를 보면, 소현세자를 내세워 인조를 몰아내고 조선의 왕권을 무리해서 교체할 의도까지는 없었다. 청나라의 일차적 목표는 어디까지나 명을 몰아내고 중원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소현세자를 왕으로 내세우겠다 협박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여전히 자신들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 인조가 행여 뒤에서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견제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청나라는,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을 잃지 않은 인조를 굳이 건드려, 조선인들의 격한 반발을 불러오는 에너지 낭비를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청나라가 원하는 조선에 대한 간섭 수준은 명나라가 조선에게 가지고 있던 지위를 대체하는 것이었지, 특별히 그 이상의 간섭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조에겐 그런 바깥 상황이나 흐름을 정확히 읽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인조는 청나라가 아들을 앞세워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덤으로, 중전이 될 야망을 품은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에 대해 끊임없이 험담을 하는 과정에서, 소현세자를 정적으로 간주하는 인조의 환상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물론, 만약 청나라가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즉위시키려 했다면 청나라의 힘으로 즉위해 청나라에서 집권 정당성을 얻는, 한마디로 청나라 앞잡이 조선 왕이 탄생하는 셈이었다. 이를 고려말 원 간섭기에 투영해 청나라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 것이라 예측하며, 그렇게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견재를 정당화했을 수 있다.[19] 하지만 정말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원간섭기식 통치를 하려 했다면, 인조가 소현세자 하나를 제거한다고 막을 수 있을 수준이 아니었고, 봉림대군으로도 얼마든지 대체 가능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조에겐 그런 것을 판단할 능력도 없었다. 그저 소현세자와 그 자식들만 없으면 자신이 안전할 거라고 믿었다.
이런 인조의 두려움을 부채질하기라도 하듯, 그런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볼모생활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의 통제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만주에서 볼모생활을 하며 조선의 구중궁궐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힘과 문화, 새로운 철학들을 접하게 된 소현세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변할 수 없는 아버지가 내심 좋게 말해 안타깝고, 나쁘게 말해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가 볼모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계몽 군주의 씨앗을 가지게 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왕이 되었을 때 실제로 계몽군주의 행보를 보일지 아닐지를 떠나, 적어도 세자 시절엔 명백히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반면 이것이 과장되었으며, 소현세자는 조선을 떠나기 전과 딱히 변한 게 없고, 딱히 뭔가 새로운 사상이나 비전을 대놓고 보여준 적도 없으며, 아담 샬을 통해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접했다는 것도 아담 샬의 구라이며, 심지어 소현세자는 청나라를 등에 업고 조선을 몰아낼 심지어 '병약'하기까지 한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현명하고 냉철한 인조는 부득이하게 아들을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는 수정주의적인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런 수정주의적 시각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본 사료에 명시된 소현세자의 개성이나 장단점에 대한 평가와도 한참 어긋난다.

앞서 말했다시피, 정말로 청나라가 왕족을 내세우는 원 간섭기식 경영을 하려 했다면, 인조가 소현세자 하나만 숙청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또한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꼭두각시나 앞잡이가 될 거라는 예측은 그저 전지적 인조 시점에서 본 변명이자 허상에 불과했다. 솔직히 그정도로 소현세자가 청나라 입장에서 다루기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애초에 청나라 입장에서야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가는 목적이, 청나라 황실의 권위도 높일겸, 조선 왕실의 권위는 찍어누르며 인조도 자유자재로 부릴 겸,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실 내에서도 주눅 들거나 겁먹어 지내며 시키는대로 청나라를 떠받드는 대신, 잡혀간 조선 백성과 그들의 안위를 챙기며, 청나라 황실의 볼모라는 입지를 도리어 활용해, 조선인 포로들을 사비를 털어 사들여 후일에 조선으로 데려갈 방법을 구비했다. 또한 도르곤이나 용골대같은 청나라 황실 밑의 장군들이나 군인들에게 꿇리는 모습을 보이지않고 '청나라 황실의 볼모로서 왔으니 나는 청나라 황제의 손님'이라는 입장으로 그들에게도 대등하거나 우대를 받는 외교적으로 굉장히 현명한 태세를 잘 보여주었다.

소현세자가 나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그걸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현실 감각은 있었다. 덤으로 참으로 든든한 아버지, 즉, 조선을 방어할 힘도 없으면서 가진 거라곤 오랑캐에 대한 혐오심에 현지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면서, 동궁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일절 드러내지 못하게 억압하는 아버지, 나중에는 자신을 정적으로 간주하는 과대망상에 빠진,[21] 아버자이기보단 짐덩어리에 가까운 아버지를 등에 업고도, 청나라의 압박에 어떨 땐 숙이고, 어떨땐 대항하며, 국본으로서 조선의 자존심과 품위를 유지하고 자국민을 힘 닿는 한 보호해냈다. 소현세자가 이런 어려운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 것 자체가 과장이고, 유난히 허약 체질이라, 귀국하자마자 돌연사했다는 시각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소현세자 병약자 설은, 승정원일기나 심양일기, 동궁일기 등에 나온 소현세자에 대한 방대한 기록 중, 진료 기록만 물량공세해 맥락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확증 편향에 가깝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물론 소현세자가 사가들 앞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조선을 만들겠다고 천명한 바는 없다. 하지만 세자가 아버지를 비판하고 다른 노선을 타겠다고 사가들 앞에서 떠들어대는 것이야말로, 성리학적 질서 하에선 멍청하고 미친 짓이다. 아들로서 하지 말아야 할 불효이고, 국본으로서 절대 말아야 할 반역 행위일 것이다. 게다가, 실록에 나온 사가의 소현세자의 인성 총평을 보면, 소현세자는 영리하지만 내향적인 타입이었다.[22] 또한 <동궁일기>를 보면, 강압적인 시강원 스승들과는 동궁 시절부터 코드가 안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심양일기>나 <동궁일기>처럼 시강원 스승들이나 사관 앞에서 소현세자가 내뱉은 말만으로 소현세자의 내면을 읽긴 어려우며, 대신 그의 행동이나 무의식적 말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소현세자는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가던 초기만 해도, 아랫사람들을 신경쓰고 배려하는 천성은 가졌을망정, 전형적인 성리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얼 등 신분 차별을 당연시 여기고, 심양에 도착한 후에도 학문 경연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볼모생활 후반, 소현세자는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경연을 그만두었고,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에선 천대받는 무인이나 노비들과 더 잘 터놓고 지낸다. 거기에 흥미롭게도 김자점이 훗날 강빈을 죽일 이유를 가져다붙이기 위해, 강빈이 소현세자의 암묵적 동의 하에 사관 보고서를 슬쩍 고쳐쓰는 일을 했다고 까는 내용이 실록에 언급되어 있다. 이는 당시 소현세자 혹은 세자빈이, 인조 입맛에 안 맞는 돌출언행을 보이고 뒷수습 했다는 정황일 수도 있다. 물론 김자점의 말이 사실일지 여부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봉림대군이 훗날 소현세자를 까면서 '자기 주장이 없이 아내에게 끌려다녔다'고 표현하는 부분이 있는데, 성리학적 남존여비 철학을 따르자면, 남성만이 판단하고 책임질 권리가 있고 여성은 판단하지 않고 남성의 결정에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다 그런 질서 속에서 봉림대군에게 저런 식의 까일 구실을 제공했다면, 세자빈은 자기 생각이 분명한 편이고, 소현세자는 '바깥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할 아녀자에 불과한' 세자빈의 생각을 귀담아듣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심지어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기독교에 호감을 드러냈던 거로 보인다.[24] 아담 샬의 회고록에 나온 소현세자의 개인 서신은 말 그대로 쐐기를 박는다. 후술하겠지만, 선교사 아담 샬의 회고록에 오류나 과장된 측면이 있음은 사실이다. 심지어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자가 아닌 왕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소현세자가 조선을 떠나기 이전과 비교해 변화하거나, 변화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아담 샬 역시 소현세자의 눈에 헛소리 하는 양이 정도로 보였을 것이며, 아담 샬이 소현세자가 기독교에 호감을 보였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을 리 없다. 이러한 소현세자의 변화는 소현세자가 사망 직후 쓰여진 <조선왕조 실록> 소현세자 졸기에도 대놓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관들은 이런 소현세자의 변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안타까워 하며 '까는 논조로' 썼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더욱 허구이기 어렵다.

아무튼, 소현세자는 변하고 있었지만, 대리청정 때와 마찬가지로 소현세자가 아버지인 국왕이 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했다. 또 이런 사고방식을 벗어날 길이 없었던 인조에게는, 소현세자가 가지기 시작한 이런, 어쩌면 조선의 미래를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 수 있었을지 모를 변화의 씨앗, 즉, 이런 독립적 행보 자체가 부담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또한, 드러난 기록에 따르면,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사비를 털어 청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예들을 구출해 낸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애민사상에 입각해 한 행동을, 인조는 자신에게 대항할 사병을 모으는 행위 정도로 상상했다.

아무튼, 이렇게 소현세자는 자기 할 일 열심히 하고, 더 나아가 기존의 조선질서에 대해 비판적인 행보를 남기는 과정에서, 인조의 아들에 대한 두려움은 차곡차곡 적립되었고, 이는 소현세자가 2차례 임시 귀국을 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3년 만에 소현세자는 1차 귀국을 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보낸 조선 사신이 "세자가 3년이나 청에 있었으니 고국 구경이나 시켜달라"며 독단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청나라는 원손과 인평대군을 볼모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한다. 비록 원손은 잠시 부모 얼굴만 보고 고국으로 돌아왔고, 인평대군 역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독단으로 진행된 이 일로 원손까지 청나라의 손아귀에 집어넣을 뻔했다고 판단한 인조는 격분해 사신을 유배보냈으며 환영 행사도 치르지 않았다. 2차 임시 귀국 때는 의심이 더욱 심해져 있었는데 "세자가 여기 오래 있었으니 또 1번 보내주겠다."며 일시 귀국시킨 것을 영구 귀국으로 잘못 이해하고 '중한 것은 버리고 작은 것은 취하니 이 어찌된 영문인가? 저들이 갑자기 호의를 보이니 내 알 수가 없구나. 조그만 일에도 의심이 생긴다. 1번 화살에 상처입은 매란 으레 이런 것이다'라면서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의심은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친정 아버지이고 인조의 사돈이며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가 화병으로 피를 토하며 죽은 이듬해, 김자점을 비롯한 삼정승이 세자빈이 "아버지 묘를 찾아 곡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표면화된다. 나중에 강빈의 사사(賜死)에 한몫을 했던 김자점조차 크게 당황해서 "빈궁(민회빈 강씨)이 부친상을 당해서 가보라고 청나라에서 보내줬는데 못 보게 하면 청나라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다시금 청했으나 무시했고 세자가 청나라로 갈 동안 찾아보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심기원의 역모까지 터지는데 인조반정의 1등 반정공신 심기원이 회은군[28]으로 바꾸고 이것저것 꾸미다 발각된 사건이다. 심기원이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사실은 별개로 치더라도, 심기원을 고변한 황익은 심기원이 원래 인조를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심양에서 나온 소현세자에게 양위시키는 방안도 강구하였으나, 막상 귀국한 세자를 보니, 그가 응하지 않을 것 같아 시도하지 않았다는 진술까지 덧붙였다. 솔직히 황익의 고변은 소현세자가 아버지를 몰아낼 의도가 없음을 보여주면 보여줬지, 반대의 경우는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단지 역모 고변 사건에서 소현세자 이름이 지나가듯 잠깐 언급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편집증적 두려움을 더더욱 키우게 되었다.
2.4. 귀국과 죽음[편집]
1644년 명나라의 수도 북경에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이 들이닥치면서 명나라는 276년만에 멸망한다. 그러나 이자성의 반란군은 오삼계와 손잡은 청나라에 의해 쓸려나가고, 청나라는 북경에 입관하여 중원을 제패한다.

1645년 청나라의 실권자인 섭정왕 도르곤[29]은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섭정왕의 자격으로 허락했다. 이에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고국인 조선을 약 9년만에 귀국했다.

하지만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인조는 이미 소현세자를 숙청하고 그의 혈손들을 왕위 계승권에서 배척할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년만에 귀국한 세자와 세손들에게 어떠한 위로의 말이나 귀국 축하 연회, 치하 등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죽기 전 3달 동안 세자에 대한 기사라고는 당대의 대문장가 이식이 세자의 귀환을 축하하는 교서를 발표했다는 것 뿐이다. 노골적인 경계의 와중에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3달도 못 되어 1645년 돌연 세상을 떠났다. 조선 왕조 실록만 보면 독살로 추정되지만, 승정원 일기, 심양일기를 토대로 한 연구결과는 지병 악화로 인한 돌연사 가능성도 제기한다. 다만 사망 원인은 여전히 명확히 판명되지 않았다.

https://namu.wiki/w/%EC%86%8C%ED%98%84%EC%84%B8%EC%9E%90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
조선왕조에서 비운의 왕세자로 회자되는 인물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 사도세자와 함께 왕세자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소현세자와 관련한 가장 큰 의혹은 바로 그의 죽음에 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 1월 4일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627년 강석기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병자호란 후 정축맹약에 따라 1637년(인조 15) 2월 8일 아우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였지만,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사망하였다. 오한이 나 병을 치료 받은 지 불과 4일 만이었고,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다. 학질은 대개 모기에 의해 발병이 되는 것으로 오한과 발열이 반복되고 땀과 갈증이 심해지며 주기적인 발작 증세와 함께 심하면 사망에 이르기도 하는 병이다. 온대지역에도 말라리아가 유행하였기에 오래 전부터 한방에서도 학질에 대한 치료로 침구와 약 처방이 있어왔다. 그런데 온대지역의 말라리아는 열대형과 달리 어린이나 노약자가 아니면 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소현세자의 병명이 학질로 진단을 받은 이후 의원들은 그에 적절한 처방을 진행하고 있었다. 침과 함께 소시호탕과 같은 탕약이 처방되었다. 그러나 세자의 증상은 급격히 나빠져 갔다.

소현세자가 사망할 즈음, [조선왕조실록]에는 심상치 않은 기록이 있다. 소현세자가 학질로 진단받던 4월 23일 다음날에 화성이 적시성(積屍星)을 범하였다는 기록과 경상도 칠곡현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실록에 지진에 대한 내용은 수천 건에 이르고 있으므로 특별히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시성과 관련한 기록은 흔한 것이 아니다. 적시성은 죽음을 상징하는 재난의 별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조선왕조 전 시기동안 적시성과 관련한 기록은 24회 정도에 불과하다. 그 만큼 드문 천문현상이며,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었다. 인조 대에 적시성과 관련한 기록은 총 4회이다. 적지 않은 기록이다. 총 4회 중에 주목되는 것은 병자호란 발발 2년 전인 1634년과 소현세자가 사망한 1645년이다.

4월 24일 세자가 침을 맞았다
4월 24일 화성이 적시성을 범하였다.

적시성을 범하는 오성(五星)은 목성과 화성이다. 이 가운데서도 화성은 목성 보다 더 불길한 것으로 해석된 듯하다. 적시성 관측 기사는 마치 조만간 있을 세자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튿날인 4월 25일 세자는 다시 침을 맞았으나,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그 다음날 26일 오시(午時)에 창경궁 환경당(歡慶堂)에서 사망했다. 급작스런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종실이었던 진원군 이세완(李世完)은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다가 시신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발견했다. 이세완이 본 세자의 모습은 학질이 아닌 약물 중독으로 죽은 모습이었다. 세자의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얼굴 반을 덮어 놓은 상태였다. 이세완은 얼굴이 온통 피로 물들어 얼굴빛이 검어도 주위 사람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소현세자가 병에 걸렸을 때 담당 의원은 이형익이라는 자였다. 이형익은 3개월 전에 의관으로 특별 채용된 자로 소현세자 내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의 애첩 조소용의 친정에 출입하던 자였다. 인조실록의 편찬자가 소현세자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조소용이 세자 내외를 평소 인조에게 무함했던 일을 함께 거론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돌연사에 가까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대하는 인조의 태도는 더 의아했다. 대신들이 의원 이형익을 국문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간청했으나, 인조는 그런 일은 다반사므로 굳이 처벌할 필요 없다고 했다. 게다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마저 거의 박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소하게 했으며, 그 예법마저도 세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부친인 인조의 미움을 받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도착한 것은 1637년 4월이었다. 심양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리, 사역원 역관, 선전관, 의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합하면 총 200명에 가까웠다. 심양에서 이들은 새로 건축한 심양관소, 즉 심관(審館)에서 생활했다. 심관은 양국간의 각종 연락사무나 세폐와 공물의 조정, 포로를 중심으로 한 민간인 문제 등을 처리하는 일종의 대사관 같은 기능을 했다.심양 생활은 단조로운 고국에서의 생활과 달리 무척 다양하고 바빴다.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그 나라 고관들과 친분을 맺었다. 또 뇌물외교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과의 무역이나 둔전(屯田) 경영에 참여하여 재력을 비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인 포로를 구출해 냈다. 부인인 세자빈 강씨는 영리하고 사업 수완이 좋아 외교적인 문제는 소현세자가, 경제적인 문제는 세자빈 강씨가 주도하였다.

청은 중국 통일의 야망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세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고자 했다. 조선을 담당하고 있던 용골대는 세자와 마음을 터 놓는 사이처럼 지냈다. 처음 심관 생활은 엄중한 감시와 제한 속에 보내야 했지만, 점차 청은 세자에게 각별하게 대했다. 몽고 각지의 행사에도 초대했고 정기적인 연회에도 세자 부부를 참석시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조선지원병과 물자요구가 있었고 이를 조선에 보고해야 하는 세자의 입장은 항상 바늘방석이었다. 1644년 마침내 청은 북경을 차지했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살했다. 더 이상 청은 조선의 왕세자를 인질로 묶어둘 이유가 없어졌고,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중원을 차지한 청의 힘을 지켜 본 소현세자는 삼전도의 굴욕만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인조와 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세력은 소현세자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오랜 인질 생활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를 반기지 않았다.

어느덧 인조에게 소현세자 내외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귀국 전부터 소현세자가 왕이 되고자 청나라를 부추겨 부친인 인조를 심양에 오게 만드는 공작을 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인조는 청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라고 할까 봐 불안해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냉담한 환대 속에 귀국했고, 그가 가져온 청나라 물건은 인조의 불쾌감을 가중시켰다. 인조에게 비친 소현세자 내외는 청에서 고초를 겪다 온 것이 아닌 호강을 하다 온 것처럼 보였다. 결국 소현세자는 가져온 채단(彩段) 4백 필과 황금(黃金) 19냥을 호조로 돌려 보냈다.

선교사 아담 샬과의 만남
소현세자는 귀국하기 직전 70일 정도를 북경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독일 출신의 신부인 아담 샬을 만났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과 친교를 맺으며 그로부터 학술과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근 8년이나 외롭게 외국 생활을 했던 소현세자로서는 벽안의 외국인이 흥미롭기도 하고 그가 가진 식견이 놀랍기도 했다.

아담 샬은 역대 중국에서 외국인으로는 가장 고위직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중국 포교 1세대인 마테오 리치의 뒤를 이어 1622년 중국으로 건너가 가톨릭 포교활동에 힘쓰며 천문·역법에도 밝아 월식(月蝕)을 예측하여 황제의 환심을 얻었다. 명나라 말에 북방의 청에 대항하기 위해 대포를 주조하기도 하였으나, 명이 망하고 청이 집권한 이후에는 다시 청 세조의 신임을 받아 천문 관측을 담당하는 흠천감의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아담 샬의 지위로 인해 소현세자는 천주당과 문연각에서 그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아담 샬도 소현세자와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겼다. 세자가 희망하는 대로 서양의 천문학을 알려주고 각종 천주교 서적과 관측기구를 선물로 주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아담 샬로 받은 선물은 천주상·지구의·천문서 등이었다. 소현세자는 천주상을 벽에 걸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고백했다.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만나면서 조선에 천주교를 선교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다. 소현세자는 자신이 귀국하면 조선에서 서양과학 서적을 간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또한 세자는 북경의 천주당 주교인 아담 샬에게 자신과 함께 조선으로 갈 서양인 신부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서양인 신부는 청에서도 부족한 상황이었고, 소현세자는 부득이 천주교 신자인 중국인 환관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강빈과 원손의 죽음
왕세자로서 국가 경영을 고민하고 탁월한 외교 감각을 지녔던 소현세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조선 역사는 달라졌을까. 소현세자의 죽음은 여러 가지로 안타까운 점이 많다. 소현세자의 불행은 그가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은 세손인 소현세자의 아들과 강빈에게는 불행을 의미했다. 왕위계승자가 제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그 끝은 죽음이었다. 인조 입장에서 강빈과 원손의 존재는 골칫거리였다. 반정을 주도하여 왕위에 오른 인조는 정통성 확보에 예민했고, 왕좌에 대한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화근을 미리 자르고자 했다. 그 첫 번째 칼끝은 강빈의 형제들에게 향했다. 인조는 봉림대군이 세자가 된 것에 강씨들이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라 하며, 이들을 귀양 보내려 했다. 드러난 죄가 없으므로 귀양 보낼 수는 없다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강빈의 형제 4명을 귀양 보냈다.

결국 죽음의 그림자는 강빈에게도 닥쳤다. 1646년 1월 3일 인조에게 올린 전복구이 안에 독약이 들어 있었다. 인조는 강빈을 주모자로 지목했다. 인조는 강빈의 나인 5명과 음식을 만든 나인 3명을 잡아다가 국문했다. 전복구이 사건은 강빈을 죽이려는 모함에 불과했다. 이 사건의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는 계속해서 강빈이 독을 넣었다고 고집을 피웠다. 한달 뒤, 인조는 김류·이경석·최명길·김육·김자점등을 불러 “강빈이 평소 무례한 여자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냐”며 처벌할 것이라 했다. 대신들은 지나친 처사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인조는 폐출되어 사사된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떠올렸다.

김자점은 인조의 독단적인 주장에 손을 들어 줬다. 그는 일찍이 후계자 논의에서 원손 대신 봉림대군을 내세우려는 인조의 주장에 편을 든 전력이 있었다. 최명길과 이경석 등 대부분의 신료들은 강빈의 죄가 비록 크다 하더라도 용서해 주는 것이 옳다고 했다. 대신들의 의견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인조는 마음먹은 것을 실천에 옮겼다. 강빈의 형제 들 중 강문성과 강문명이 누이가 한 일을 모를 리가 없다는 죄목으로 국문을 받다 곤장에 맞아 죽었다. 강씨 형제가 죽자 그 다음 차례가 강빈임을 세상이 다 짐작했다. 3월 15일, 강빈은 왕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다. 이어서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 또한 제주도 유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강빈의 친정 어머니도 처형되었다.

일찍이 인조는 소현세자를 위하여 신부감을 고르는데 한 처녀가 부덕을 갖춘 것 같아 내심 마음으로 점지해 두었다. 그러나 그녀는 보기와 달리 앉고 서는 것이 예의가 없고 마음대로 크게 웃었으며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인조는 결국 다른 여성을 며느리 감으로 선택했다. 이후 인조는 부덕 높은 부인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그녀는 세자빈 간택 시에 며느리감으로 점지해 둔 바로 그 처자였다. 이 때 인조는 “내가 그녀의 꾀에 넘어갔도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화려한 세자빈의 자리가 목숨마저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현세자 [昭顯世子] - 더 큰 세상을 꿈꾸다 간 비운의 왕세자 (인물한국사, 정성희, 장선환)

 

 

소현세자에 대한 자료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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