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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by 아이루스 2022.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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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소현세자
소현세자 죽음
올빼미 소현세자
소현세자 봉림대군
소현세자 아들


소현세자 독살소현 세자의 의문의 죽음이 궁금한데요^^
소현세자는 [ 昭顯世子 ]는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의 맏아들.입니다. 
출생-사망1612 ~ 1645

 

성은 이(李), 이름은 왕이며, 시호는 소현(昭顯)이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이다. 1627년(인조 5)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愍懷嬪) 강씨와 혼인하여 경선군(慶善君) 이석철(李石鐵, 1636〜1648), 경완군(慶完君) 이석린(李石磷, 1640〜1648), 경안군(慶安君) 이석견(李石堅, 1644〜1665), 경숙군주(慶淑郡主, 1637〜1655), 경녕군주(慶寧郡主, 1642〜1682), 경순군주(慶順郡主, 1643〜1654) 등 3남 3녀를 두었다.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 음력 정월 4일에 태어나 1625년(인조 3) 정월에 왕세자(王世子)로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원익(李元翼), 신흠(申欽)과 함께 전주(全州)에 내려가 분조(分朝)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했고, 전쟁이 끝나자 강화도로 피신했던 인조를 호위해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참의(參議) 강석기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다. 1635년(인조 13) 모친인 인열왕후가 죽어 상을 치르다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세자빈과 함께 인질이 되어 청나라의 수도였던 성경[盛京, 지금의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그 뒤 소현세자는 1640년(인조 18)과 1644년(인조 22) 봄에 인조의 병문안을 위해 잠시 귀국했을 때를 빼고 9년 동안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다. 1644년 청나라가 산해관(山海關)을 넘어서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을 점령하자, 그해 가을에는 베이징으로 옮겨졌다가, 1645년(인조 23) 음력 2월에야 억류에서 풀려나 귀국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으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게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지원군을 파병하겠다는 등의 약속을 하였으나, 오히려 친명배청의식이 강화되어 청나라와 자주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의 행사와 사냥 등에 참여하며 청나라 고위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조선인 포로의 속환문제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지원요구 등 여러 정치·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했다. 베이징에 있을 때에는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 교류하며 천구의와 천문서,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당시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그 편지에서 소현세자는 서학(西學)의 보급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1645년 음력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그해 음력 4월 26일에 창경궁(昌慶宮)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고양(高陽)의 소경원(昭慶園)에 매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소현세자가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가 염습(斂襲)에 참여하고 나와서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았다'는 증언을 남겼다는 내용도 기록하고 있다(인조 23년 6월 27일).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한 것을 인조가 못마땅하게 여겼고, 인조에게 총애를 받던 소용(昭容) 조씨가 세자와 세자빈을 헐뜯어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소현세자가 죽은 뒤에 인조는 세손(世孫)인 이석철이 있는데도,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 제17대 효종)을 세자로 삼았다. 당시 영의정 김류(金瑬) 등 대신들이 반대했는데도 인조는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했고,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에는 소용 조씨를 저주하고 임금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는 혐의로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를 죽였다. 그리고 1647년(인조 25)에는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당시 12세와 8세였던 이석철과 이석린은 이듬해 제주도에서 죽었고, 4세였던 이석견도 효종 때인 1656년(효종 7)에야 유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인조가 소현세자의 세자빈과 자식들에게도 무자비하게 대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인조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현세자 [昭顯世子]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다음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가 갑자기 죽었다고 합니다. 몇몇 왕족들은 소현 세자의 시신을 보며 누군가 독약을 몰래 먹여 죽인 것 같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1. 소현 세자를 오해하기 시작한 인조
소현 세자의 의문의 죽음 본문 이미지 2
소현 세자가 조선에 없었던 8년은 인조에게 무척 괴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전쟁을 치르고 나라꼴이 말이 아니니 왕도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겠죠.

그때 청에서 소현 세자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장사로 막대한 돈을 벌어 포로로 잡혀 온 백성들을 자유롭게 해 주고, 외교관으로 활약한다는 이야기였지요.

인조는 어느덧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만큼 성장한 세자가 두렵게 느껴졌어요.

때마침 궁궐에서는 인조의 불안함을 부추길 만한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청에서 인조를 몰아내고 소현 세자를 왕에 앉힐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어요.

2. 인조, 소현 세자에게 등을 돌리다
청 입장에서는 명과 친하게 지내고 청에 반대하는 친명반청 정책을 부르짖으며 사사건건 청을 무시하는 인조보다 청과 친분이 있는 소현 세자가 왕이 되는 게 더 편하다는 이야기가 돈 거예요.

인조는 아들인 소현 세자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려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들에 대한 인조의 믿음이 깨진 거죠.

신하들도 소현 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기기는 마찬가지였어요.

신하들 대부분은 광해군을 몰아낼 때 함께했던 사람들로, 소현 세자가 청과 가깝게 지낼수록 친명반청 정책을 위협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3. 소현 세자를 미워한 인조의 후궁
그 무렵 궁궐에서는 인조의 후궁인 귀인 조씨가 소현 세자에 대해 안 좋은 말을 인조에게 많이 했어요.

세자빈 강씨가 자신을 무시하고 왕비에게만 예의를 차린다고 생각해 세자빈 강씨를 미워했거든요.

그래서 걸핏하면 인조에게 세자 부부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고, 인조도 점차 그녀의 꼬임에 넘어가기 시작했죠.

그런데 귀국한 지 두 달! 갑자기 소현 세자는 학질이라는 병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4. 갑자기 죽어버린 소현 세자
소현 세자가 학질을 앓기 시작한 지 3일 후! 소현 세자가 갑자기 죽고 맙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여전히 의문에 쌓여 있어요.

기록에 의하면 죽은 세자의 모습이 병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독살당한 사람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자의 치료를 담당한 의사가 귀인 조씨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해요. 참 의심스러운 대목이지요?

5. 독살당한 것으로 보이는 소현 세자의 시신
소현 세자의 의문의 죽음 본문 이미지 3
온 몸이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고, 눈, 코, 입, 귀··· 얼굴에 있는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와 있었어요.

누군가 세자에게 독을 먹여 죽인 것이 분명해요.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그걸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더라고요.

6. 아들의 죽음을 대하는 인조의 이해 못할 태도

소현 세자의 장례는 왕실의 법도에 따라 3년 상을 치렀어야 했는데, 평민의 장례처럼 7일장으로 줄여서 간소하게 진행되었어요.

세자의 관에 왕의 관을 의미하는 글자도 쓰지 못하게 하고, 무덤 이름도 세자의 무덤에 사용하는 ‘원’이 아닌, ‘묘’를 쓰게 했지요.

그리고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소현 세자의 무덤을 찾지 않았어요.

7. 인조, 아들의 장례를 빨리 치르려 하다
신하들이 소현 세자의 치료를 담당했던 어의(궁궐 내에서, 임금이나 왕족의 병을 치료하던 의원) 이형익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인조는 대꾸조차 없었어요.

또한 세자가 왜 죽게 되었는지 알아봐야 한다는 신하들의 의견을 인조는 전부 무시해 버렸지요.

오히려 어의 이형익이 무슨 죄가 있겠냐며 그를 감싸고, 다른 신하들이 세자의 시체를 조사하지 못하도록 재빨리 관에 넣어 장례식을 앞당겨 진행했지요.

신하들은 세자의 죽음에 예를 다하지 않는 왕의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8. 소현 세자의 아들이 아니라 봉림 대군이 왕위를 잇다
원칙대로라면 ‘첫째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소현 세자의 아들인 원손이 왕위를 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조는 계승 서열을 무시하고 소현 세자의 동생인 봉림 대군에게 왕위를 잇게 했지요.

9. 소현 세자의 남은 가족들도 고초를 겪다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 소현 세자. 그의 남은 가족들도 비극을 피할 수는 없었어요.

소현 세자를 아끼던 청이 조선에게 복수할 것이 두려워 아예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화살은 세자빈 강씨와 그녀의 가족들을 향했어요. 세자빈 강씨에게는 시아버지의 후궁인 귀인 조씨를 저주하고 시아버지 인조의 수라상에 올릴 음식에 독을 넣었다는 누명을 씌워 사약을 내렸죠.

결국 세자빈 강씨는 시아버지에게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세자빈이 되었어요.

10. 소현 세자의 아들들을 유배 보내다
인조는 손자들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 보냈고, 그곳에서 첫째와 둘째가 병으로 죽었죠. 셋째는 작은아버지인 효종에 의해 왕자의 신분을 되찾았지만 20대 초반에 죽었어요.


명확한 증거도 없이 추측만으로 세자빈 강씨에게 사약을 내린 것은 너무한 일이오. 또 세자 저하의 첫째 아들이 아닌 봉림 대군이 왕위를 잇는 것 역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 생각하오.

불쌍한 세자 저하께서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지 겨우 두 달,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얼룩진 궁궐 분위기 속에서 소현 세자는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새로운 조선을 세우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한 채 말이지요.

11. 못다 이룬 소현 세자의 꿈
분명한 것은 소현 세자의 죽음으로 조선 역사의 흐름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동생 봉림 대군이 조선의 17대 왕 효종으로 등극하면서 오랑캐인 청을 무찌르자는 북벌론이 대세가 되었지요.

북벌이란 청을 정벌하여 문화가 높은 조선이 문화가 낮은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준 명을 대신하여 복수하자는 주장이에요.

반면 선진국 청을 배우자는 북학론은 훨씬 더 늦게 나타나게 되었어요.

북학론은 조선 후기 청을 오랑캐의 나라로만 여겨 무조건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발달된 문물과 생활양식을 받아들이자는 주장이에요.

만약 소현 세자가 죽지 않고 왕위에 올라 조선이 청, 서양 등의 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하며 발전된 기술을 들여왔다면 지금의 역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네이버 지식백과] 소현 세자의 의문의 죽음 (생방송 한국사 6, 2017.01.20., 심선민, 최인수, 박종호, 고종훈, 공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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