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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정보

광주 근교 가볼만한 곳 담양 소쇄원 배롱나무꽃 예쁜 곳

by 아이루스 2022.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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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근교 가볼만한 곳 담양 소쇄원 인데요.
소쇄원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모여 놀던 곳으로 경관이 아름다워 조선최고의 민간정원이랍니다.


올라가는 길의 대나무뿐만 아니라
계곡에 흐르는물 그리고 배롱나무꽃이 참 예쁘게 피어있어 아름다움을 자아냅니다
정자에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다보면 조선시대로 타임리프를 한 느낌이 듭니다.

광주 근교 가볼만한곳 담양 소쇄원 여름에도 바람이 불어 시원하답니다.


입장료는 2000원입니다

 


소쇄원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간 원림이다.

한국 민간원림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명승 40호로 지정된 곳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경외와 순응, 도가적 삶을 산 조선시대 선비들의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서 경관의 아름다움이 가장 탁월하게 드러난 문화유산의 보배이다.

내원內園의 면적은 1400여 평의 공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조성된 건축, 조경물은 상징적 체계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절묘하게 이뤄내며, 곳곳에 조선시대 선비들의 심상이 오롯이 묻어나 있는 공간이다. 물론 외원外園까지 포함하면 수 만평에 이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봉대와 광풍각 그리고 제월당이 있으며, 긴 담장이 동쪽에 걸쳐 있고, 북쪽의 산 사면에서 흘러내린 물이 계곡을 이루고 흘러내려와 담장 밑을 통과하여 소쇄원의 중심을 관통한다.

“소쇄원”의 주요한 조경 수목은 대나무와 매화, 소나무, 난, 동백, 오동, 배롱, 산사나무, 측백, 치자, 살구, 산수유, 황매화 등이 있으며, 초본류는 석창포와 창포, 맥문동, 꽃무릇, 국화 등이 있다. 조경물로는 너럭바위, 흘러내리는 폭포, 걸상모양의 탑암榻岩과 책상바위 상암床岩, 홈을 판 고목刳木으로 물을 이어가는 두 개의 연못, 上下池가 있다. 뿐만 아니라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애양단愛陽壇, 계곡을 건너지르는 외나무다리 약작略彴, 경사지에 적절히 단을 쌓아 꽃과 나무를 심고 담장으로 내부공간을 아우르고 감싸는 조화로운 곳이다.  이러한 공간의 조성은 조선 중종 때의 선비로서 조광조의 제자인 소쇄공 양산보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정확한 조영 시기는 1530년대에 시작하여 그의 자식과 손자 대에 이르러 완성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스승이 기묘사화(1519년)로 사사賜死되자 현세적인 꿈을 접고 은둔하여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산 것이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건물이 불에 타기도 했지만 후손들에 의하여 다시 복원, 중수되어 현재까지 15대에 걸쳐 후손들이 잘 가꾸어 나가고 있는
조선 최고의 민간정원이라 할 수 있다.


소쇄원과 원림문화 1)

우리나라의 대표적 원림으로 명승 40호인 소쇄원은
양산보에 의하여 조영되었으며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광주호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이 지방의 진산인 무등산이 바라다 보이고 뒤로는 장원봉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곳으로 무등산 원효계곡이 광주호로 흘러 내려 오는 증암천(자미탄)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의 경승지와 더불어 지역선비와 주민들의 휴식 장소로서 학문도야 장소로서 넓게 이용된 식영정, 면앙정, 송강정, 환벽당, 취가정, 독수정 등 많은 독립된 정자와 원림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소쇄원이다.
   소쇄원(瀟灑園)이라는 어려운 한자이름이 뜻함은 빗소리 소(瀟), 혹은 물맑고 깊을 소(瀟)이고 灑는 쇄, 새, 혹은 사라고 읽을 수 있는데 물 뿌릴 쇄(灑)나 깨끗할 쇄(灑)라는 뜻과 음을 갖는다. 소쇄란 孔德璋의 <北山移文>에 나오는 말로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말이다. 결국 굳이 소쇄원의 이름을 풀어쓴다면 “물 맑고, 시원하며 깨끗한 원림”이라 하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덧붙이면 ‘속세를 떠난 느낌이 있다’는 뜻으로도 말할 수 있겠다.

  소쇄원을 庭園, 혹은 庭苑이라고 하여야 할지 園林이라 하여야 할지 분명하지 않으나 원림이라 부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원림이란 정원과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원래의 뜻은 사뭇 다르다. 정원이라는 말은 역사가 짧은 말로 일본인들이 명치시대에 만들어낸 것인데 한 국에는 식민지시대에 이식된 단어이다. 정원이 일반적으로 도심 속의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작업을 통하여 동산[園]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옛날에는 성 밖) 에서 동산[園]과 숲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정 원과 원림에서 자연과 인공의 관계는 정반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정원과 윈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 어원부터 살펴보자. 즉 庭 과 園, 혹은 苑의 뜻은 어느 정도 구분하여 사용되고 있다. 또한 정원을 한자로 표기할 때 庭園과 庭苑등으로 달리 표현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庭園이 널리 쓰인다2). 안계복3)은 삼국시대로 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공간적 범위를 나타내는 용어가 “庭”이었다 한다. 庭(뜰)字의 쓰임에 나타난 공간적 특징은 건물로 된 인공공간으로서 평면적이고 소규모 식재가 이루어 진 반면 園(동산)은 식물위주의 자연적인 공간특징을 나타내는 곳이었고 苑은 帝王이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였다고 기술하였다.

  庭園이란 庭과 園의 복합어이다. 본래 庭이란 宮中을 뜻하는 말이었는데 후세에 와서 뜰을 가리키는 말4), 혹은 堂아래부터 門사이, 또는 건물과 건 물사이를 말하는 의미로 변하였다.

  園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과는 달리 과일나무나 채소를 심어 가꾸는 자리로서 울타리에 의해서 돌려 쌓인 곳을 말하는데, 중국에서의 사 실상 정원의 시작인 漢代 上林苑에서 園대신에 苑으로 동음의 苑을 사용한 이후부터 동양에서는 정원이라고 써왔다. 또 정원의 園에 있어 채소를 심는 곳은 圃라 하였고, 園의 규모가 커서 숲이나 연못이 꾸며짐으로서 새와 짐승을 기를 수 있는 크기와 기능을 가지게 되는 곳은 囿라 하였다7). 또 有牆曰苑 無牆曰囿라 하였으니 정원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소쇄원은 양산보(1503~1557)가 처음 터를 잡아 가꾸었던 별서(別墅)원림이다. 별서란 여러 가지의 뜻을 갖는다. 일반적인 의미는
1) 은둔생활을 하기 위한 것,
2) 효도하기 위한 것,
3) 서구의 별장성격을 갖는 것 등이다

이러한 내용에서 결국 별서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여 은거생활을 하기 위한 곳으로 저택에서 떨어진 산수가 빼어난 장소에서 지어 진 별저(別邸)를 지칭하는 것”이다.9) 또 다른 의미는 우리나라에서 고려시대 이후 발전한 農莊을 일명 별서라고 하는 史實에서 출발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는 곳”10)과 “國王과 국가실력자가 소유하는 일단의 대규모 토지11)”를 말하며 “塋墓 소재지에 경영하는 閑適之居處”라고 정의되는 것이다. 별서(別墅)와 유사한 의미를 갖는 것에는 別業, 鄕居, 農庄(장), 田廬란 용어가 있다.12)

  소쇄원의 경우는 살림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치 좋은 곳에 조성된 정원으로 전원생활과 문화생활을 함께한 공간을 말한다 하겠다. 상주하는 일상 생활용 주거에서 도보거리에 있는 가까운 경승지에 조영된 제2의 주거와 주변의 원림이라 할 것이다. 이 경우 건물은 상주하는 주택이 아니므로 아무 래도 간소하게 되어 한시적 체류를 위한 구조로 지어지고 인접지에 관리인의 상주주택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원은 사실상 건물과 옥외 공간이 일체가 되거나 옥외공간이 건물보다 우세한 형국을 갖게 된다고 할 것이다.13)

  즉 소쇄원은 생활기반인 창암촌과 지척인 곳에 위치하는 삶의 공간이며 사상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교류하는 사람들에게 강학하는 학문의 장소이며, 풍류와 위락의 공간으로 제공되어져 당대의 문인들이 누정가단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이곳은 풍경에서나 의미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또한 별서에는 亭, 榭, 軒, 堂등의 건물을 짓고 오늘날의 별장과 같은 기능을 하기도 하였는데 소쇄원에서도 이러한 건물들이 있고 별장과 같은 기능을 갖기도 하였다.
  정동오, 민경현, 윤국병 등의 조경사가들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별서원림을 소쇄원을 비롯하여 양산의 소한정, 옥호정, 부용동원림, 다산초당, 남 간정사 등이라 하고 있다. 이외에도 근자에 알려진 곳으로 강진에는 이담로와 그의 후손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백운동원림이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원림문화가 발달하였는데 원림의 중심은 누정이다. 우리나라에는 어디를 가든지 도처에 누정이 있다. 몇 백 년 전의 누정으로 부터 근대의 것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이름난 누정의 수가 885개나 될 정도이고 그 중의 반이 영남과 호남에 퍼 져 있는 것이었다. 영호남 지방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따뜻한 남쪽에서 더욱 발달하였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누정이란 누각과 정자의 약칭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누정조에 의하면 樓亭을 樓, 閣, 亭, 齋, 精舍, 臺, 堂, 軒, 廳, 館, 觀, 房 등으로 달 리 불리고 있다.14) 이처럼 누정을 부르는 용어가 여럿인 것처럼 기능도 역시 참으로 다양하다.15) 이를 간단히 말하면 逍遙, 吟風, 隱遁, 講學등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각기 누정의 기능과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몇 가지 기능을 복합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합적으로 표현된 기능을 구체적으로 구분하여 보면 1. 詩壇, 2. 講學所, 3. 齋室, 4. 別墅, 5. 향약시행처, 6. 養老, 교화소, 7. 射場, 8. 종 회소, 9. 치수, 10. 監農, 11. 문루, 성루, 12. 測候, 13. 지휘본부 등으로 나타난다.

  누정은 우리나라 근대사회에 있어서 선비들의 지적인 활동의 장소였다. 이름 있는 인사나 집안에서는 이를 건립 관리하였고, 풍경이 좋은 장소에 두 어 시 짓고 노래하며 사귐을 갖는 장소였다. 또한 속세에 뜻을 두지 않는 자들의 은둔처이기도 하였다. 혼탁한 정치에 미련을 버리고 낙향한 선비나 속 세의 영욕에 해탈한 은둔자들에게 더 없는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누정마루에 앉아 바라다보는 경치는 그 사람의 여유를 나타내며, 仙人들의 모습과 흡사할지도 모른다.

  누정에는 편액이 걸려있다. 외부에 걸려 있는 것은 누정의 명칭이요, 내부에 걸려있는 것은 기문과 시문인데 건물을 지으면서 바라는 바를 글로 써 서 원하였다. 누정의 이름은 주로 세 글자로 橫書로 새겼고 누정기는 비교적 긴 한 문장으로 오언 또는 七言의 한시로서 縱書로 새겼다. 이러한 글은 주로 당대의 명류시인의 참여로 이루어졌다.16)

  누정이 건립된 위치는 강이나 천을 낀 산록이 보편적이며 자연히 조용하고 경치 좋은 곳을 택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산과 강을 낀 경승지에 자리 잡 지 않고 감농에 편리하도록 전답의 한가운데 있는 경우나 깊은 산속에 있어 재실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최소한 팔경을 설정하여 주변 의 경관을 즐길 줄 알고 또한 높은 의미도 부여하였다. 누정건축은 원림의 주된 구성요소로서 그 의미가 크다 할 것이다. 즉 원림에는 반드시 누정이 있어 건축적 생활공간으로서 내부공간과 절경을 보고 즐기는 외부공간이 적절히 융화된 것이다.

  전남지방의 누정건축의 구조는 대개가 3-4間 정도의 다소 적은 규모이다. 평면 형태는 방형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 일반적이고 간혹 육각, 팔각 혹 은 맞배지붕이나 우진각지붕의 형태를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소쇄원이 있는 담양지방에서는 육각, 혹은 팔각은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실(室)의 구 성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전체가 대청마루를 깐 통활한 형이고, 다른 하나는 모두 방[齋室]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또 하나는 이 양 자의 중간형 즉 1-2개의 재실과 대청을 함께 갖고 있는 형이다. 특히 전남지방의 누정건축은 소쇄원, 부용동원림, 다산초당 등의 원림과 함께 한국의 전통정원으로 단연 손꼽히고 있는 귀중한 유구이다. 광주,전남지방에 산재되어 있는 누정의 정확한 수효는 아직까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전 남대학교 호남문화연구소에서 조사한 바 그 수효는 1천여개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양산보와 그의 후손
소쇄원을 만든 사람은 양산보라는 처사處士로 1503년에 태어나 1557년에 생을 마감한 분이다.

15살에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는데 스승이 바른 정치를 구현하다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화순 능주에서 귀양을 살다 사약을 받고 죽 게 되자 17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평생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여 처사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이는 선비가 불행하게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도를 마음에 담아둘 뿐 펼치지 못하며 교화는 자신의 집안으로만 그치고 넓혀지지 못한다는 옛적의 말 을 볼 때 그로 인해 양산보는 선비의 큰 뜻을 펴지 못하였으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학문에 힘쓰며, 지역의 선비와 교류하고 나무와 화초를 가꾸고 원림을 조성하며 바른 삶을 살아간 선비의 본보기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소쇄공 양산보의 행적을 기록한 글을 보면 “본래 덕성이 높은 데다 또한 조용한 곳에서 오랫동안 학식을 함양했으니 알차고 참된 인격자로서 호남에 서 위대한 선비로 존경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안에서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언제든지 부모 곁에 있으면서 환한 얼굴로 부모님의 말씀에 순 종하며 조석으로 인사드리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에 있어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였으며 「사람의 자식된 자로서 부모에게 효도를 못하는 자를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수백마디로 된 효부(孝賦)를 지어 효에 대한 근본정신과 사상을 밝혔다. 더욱이 “한문에 밝지 않은 일반인들의 이해를 위해 한글을 새기어 적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퍽 감동적인 책이라 아니할 수 없다.” 라고 후학인 이민서는 소쇄공을 얘기하고 있다.

그의 부인은 광산김씨로 정랑 김후의 따님이며 환벽당 주인인 사촌 김윤제의 누이였다. 결혼을 한 해는 언제인지 확실치 않지만 19세에 첫 아들을 낳 고 21세에 차남인 자징이 태어나고 25세에 셋째 아들 자정이 태어났으며 그 해에 부인이 죽게 되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양산보의 생애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 지을 수 있다.
1517년 이전까지의 성장기와 1517년부터 1519년까지의 上京 수학기, 그리고 1519년부터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의 낙향 은일기로 쉽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중 은일기인 20대에는 이미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았으며, 소쇄원에 대한 일단의 조성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30대에는 면앙정 송순,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등과의 학문적 교유와 더불어 구체적인 소쇄원의 조영에 들어갔으며 40대 초반에 완결을 지은 것으 로 알려져 있다. 40대 중반에는 벼슬길에 천거를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고 은일하며 부친에 대한 효성을 다하였고, 50대에는 생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 이다.


한편, 소쇄원 지어진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서 김인후의 “瀟灑亭卽事(소쇄정에 올라 즉석에서 지은 시)”가 쓰여진 것이 1528년인데 송강 정철이 지은 “瀟灑園題草亭”이란 시에서 '자신 이 태어난 해에 이 정자가 조성되었다' 하여 1536년으로 혼돈된다. 하지만 면앙정 송순의 “從弟梁彦鎭瀟灑亭”이 1534년에 만들어진 것을 보더라 도 1520년 중반 소쇄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536년경 1차적인 완성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이 소쇄원을 만든 주인 양산보는 후손에게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 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훈을 남긴다. 이는 평천장平泉莊의 가르침을 지 시한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지역이 정유재란 때 왜적들의 집중적인 공략을 받았기 때문에 소쇄원의 건물들이 불에 타버리고 주인의 손자인 양 천운이 다시 중건하게 된 기록이 남아있으며, 5대손인 양경지에 의해 완전 복구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소쇄원은 은둔을 위한 정자이지만 그의 곧은 뜻을 알게 된 사림들은 소쇄원을 중요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주인과 교류를 하게 됨으로서 열린 공간으로 호남 사림의 명소가 된 것이다. 소쇄원 주인과 교류하였던 인사들의 면모를 보면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선비들이었다.
이후 소쇄원은 양산보의 유훈대로 후손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15대에 이르고 있다. 

  양산보를 흔히 처사處士라 한다. 이는 벼슬을 하지 않고 소쇄원에서 은거, 은둔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호를 소쇄옹이라 하였고 그의 원 림을 소쇄원이라 하였다. 이 또한 ‘맑고 깨끗한’ 세상을 고대하는 간절한 염원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 지리산의 처사 조식曺植이 소미성小微星1)에 비유되었던 것과 유사하다. 여기에서 소미란 송나라 때에 임금으로부터 소미선생이라는 호칭을 하사받은 처사 강지를 이르는데 이는 은거하는 처사를 뜻한다. 또한 식영정 주변의 뒷산이 星山인 것도 사화로 인해 내려와 임간에서 지조와 절개를 지켰던 처사들 을 상징하는 소미성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 하겠다. 여기에서 양산보를 처사라 하며 조식과 관련되며 소미 혹은 소미성에 비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산보의 소쇄원 조영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武夷의 九曲과 같은 선계로서의 가치 이외에 재산으로서 소쇄원과 다소나마 인공을 가미한 소쇄원을 이야기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즉 武夷精舍와 같은 공간의 의미는 익히 얘기 한 바와 같고 양산보가 소쇄원의 언덕 하나, 골짜기 하나라 도 자신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平泉莊 故事’를 따라서 ‘소쇄원을 팔거나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라’고 유언했다는 사실이다. 평천장 고사는 중국 당대의 이덕유가 낙양성 동쪽 교외에 평천장을 조영하면서 후손에게 ‘평천장을 팔거나 평천장에 있는 일수일석一樹一石이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인데, 김인후가 이를 본떠서 한양의 동쪽 교외에 평천장이라는 별서를 만들고 역시 비슷한 당부를 「평천장기」에 남긴 사례를 양산보가 본뜬 것이라 하겠다.    “나의 아들과 손자가 현명하여 그 당堂을 얽어 세운 뜻을 이해한다면, 나의 혼백이 영원히 간 뒤에도 거의 수 백년 동안을 보전하여 지킬 것이니 너 희들은 힘쓸 것이다. 따라서 당의 벽 사이에 써서 자손에게 전해 보인다.”라고 한 사실에서 양산보가 단순히 이덕유나 김인후의 사례를 본뜨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고 양산보의 자연관이나 정원관을 살펴볼 수 있다. 즉 자연 속에 묻혀 혼연일체의 삶을 살고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도교적인 삶보다는 자연을 구획지어 자신만의 세계인 정원을 만들고 살기를 원했으며,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일종의 인공경관인 정원을 다시 자연 속으로 돌려보내기 보 다는 후손이 계속 가꾸고 소유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상당히 현세적이고 어떻게 보면 서구적인 자연관을 가졌던 것이 아닐까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도연명의 행적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과 소쇄원의 조영기법에서 많은 인공물, 즉 건축물과 담장, 연못, 축대, 다리 등이 도입 되고 조형성을 추구했다는 사실에서도 뒷받침이 된다. 담장으로 공간을 구획지어 경계를 이루고 축대를 쌓아 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들여 조원을 살찌 게 하였으며 사람이 사는 공간을 만들어 지내는데 편리하게 하였으니 이 모든 것이 그의 자연에 대한 이해가 남과 달랐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쇄원의 경관에서 인공과 자연의 조화가 적절히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뛰어난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하여 당시의 별서문화의 정수를 구현할 수 있도록 영향을 준 여러 국면의 덕택이라고 하겠다


소쇄원 출처 소쇄원

주차장에핀 배롱나무꽃

우물

상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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