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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뉴스 정보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by 아이루스 2022.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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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종일 들었던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새로운 대통력 취임식

민주주의

자유대한민국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

 

 

김지하

 

대한민국의 시인. 전라남도 목포시 출신. 본명은 김영일로 김지하는 지하(地下)에서 따온 필명이다. 처음 쓴 필명은 성 없이 그냥 지하였는데, 하도 주변인들이 이름 대신 불러대는 통에 성을 붙이고 한자까지 갈아버렸다고. 목포산정초등학교, 중동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나왔다. 2008년부터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석좌교수로 있다가 2013년부터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임했다.

 

김지하 

대한민국의 시인. 전라남도 목포시 출신. 본명은 김영일로 김지하는 지하(地下)에서 따온 필명이다. 처음 쓴 필명은 성 없이 그냥 지하였는데, 하도 주변인들이 이름 대신 불러대는 통에 성을 붙이고 한자까지 갈아버렸다고. 목포산정초등학교, 중동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나왔다. 2008년부터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석좌교수로 있다가 2013년부터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좌교수로 재임했다.

 

김지하생애
반독재 투쟁 시절

4.19 혁명 이후로 학생운동을 했으며, 1964년 6.3 항쟁에 참여했다가 수감되어 4개월간 복역했다.

1970년 저항시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독재에 항거하다가 정권의 눈 밖에 나서 필화를 입었고, 그는 반공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시기에 소리꾼 임진택이 담론시 '비어'의 첫부분인 '소리내력'을 판소리화하기도 했다.

1971년 가수 김민기와 함께 야학 활동을 시작했다. 2년 후 김민기는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에서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작곡한다.

1973년 4월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전남 홍도 영화촬영장에서 체포된 후 옥고를 겪었으며 최종적으로 사형까지 언도받았다가 1980년에 석방되었다.

1975년 〈타는 목마름으로〉가 발표되었다.

적극적으로 독재에 저항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였으며 김수환 추기경 역시 이러한 모습을 대단하게 여기는 동시에 너무 열혈이 지나친 거 아니냐며 많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이때의 일로 인하여 노벨평화상과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추천된 경력도 있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년 수상),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정지용 문학상, 만해문학상까지 수상했을 정도의 대단한 참여시인이자 민중시인이었다.

김지하의 시는 초기 〈오적〉으로 대표되는 재기 넘치는 풍자 정신을 보여주는 시편과 감옥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열망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중기의 시들을 통해 우리 문학사에 큰 족적으로 남아있다.

 


김지하 생명사상
김지하는 70년대 후반 5년여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서적을 탐독하면서 '생명사상'을 깨우쳤다고 한다. 재판이 끝나고 책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김지하는 미친 듯이 책을 읽어댔다고 한다. 선불교, 동학, 생태학 등의 책을 섭렵했는데, 인간과 삶의 진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생태학에서 시작했으나 더 깊은 내면적 지식과 무의식적 지혜를 갈구하게 되었고 그때 접한 것이 선불교 사상이었다. 원래 그의 종교는 천주교였는데, 옥중에서 선불교에 크게 경도되었다. 아울러 동학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김지하는 선불교 관련 경전들을 읽으며 영적인 깨달음을 얻어 갔다. 그리고 감옥에서 꽃과 풀을 보며 깨달음을 이어갔다. 저런 미물들도 생명이며 '무소부재(無所不在)’라 못 가는 곳 없고 없는 데가 없으며 봄이 되어서는 자라고 꽃까지 피우는데, 하물며 고등 생명인 인간의 생명은 더할나위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 여기에 민족주의와 반전주의가 더해졌다.

출감 이후 김지하는 장모인 박경리 선생의 도움으로 원주에 거주하게 된다. 이후 80년대에 걸쳐 김지하는 여러 종교의 생명 존중 사상을 혼합하여 수용하고 생명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출소 이후 그는 천주교, 선불교, 원불교, 도교 등 생명 존중과 관련된 각종 종교들을 섭렵해 갔다. 그의 관심은 증산도와 환단고기 등에까지 미쳤다.[7] 1990년대 후반에는 사실상 사이비 종교로 여겨지고 있는 단월드의 창시자 이승헌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에 이승헌의 내부비리를 접한 후 탈퇴하여 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과 환경운동가 최열, 강대인 당시 크리스챤아카데미 부원장,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등과 함께 '민족정신회복시민운동연합'을 창설해 단월드에 대한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생명사상과 관련된 여러 종교들을 포괄적으로 수용했는데 이것이 개별 종교들이 오히려 김지하를 못마땅해하고 그를 배척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90년대 이후 그가 보수적 성향을 보이자 진보 진영도 그가 고문 후유증으로 사이비 종교에 심취하게 되었다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991년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기고하면서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이후 진보 진영과 적대 관계를 이루게 된다.

 

1991년 죽음의 굿판 칼럼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가 시위 중 전경의 구타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1991년 연쇄 분신 파동은 온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었다. 이에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기고한다.[8] 김지하는 생명주의 사상에서 접근하여, 목숨을 버리면서 하는 민주화 시위를 저주의 굿판에 비유하였다. 이 칼럼에서 김지하는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 열사호칭과 대규모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면서 운동권 세력들이 연이은 자살을 조장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심지어 이 칼럼에는 학생들처럼 자신의 죽음을 강요당했던 자신의 경험이 스며있다고 주장했다.

이 칼럼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왔다. 항상 김지하를 든든한 민주화의 동지로 여겨왔던 운동권과 진보 진영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김지하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자신들을 부도덕한 세력으로 매도하면서, 군부독재에 아부하고 있다고 과장 해석하며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결국 진보 성향 문인들의 단체였던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김지하를 제명하였고, 진보진영에선 김지하를 변절자, 배신자로 규정하고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 대다수 운동권 인사들, 진보 성향 문인들은 김지하와의 사적인 만남조차 거부했다고 한다.

반면에 정권과 보수우익세력은 이 칼럼을 대서특필하면서 운동권을 혁명을 위해서 사람의 목숨조차 도구로 쓰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김지하의 칼럼 이후 서강대 총장 박홍 루카 신부가 바통을 이어받아 배후세력설을 주장했고, 공안 당국이 때맞춰 전민련 간부 김기설 자살 사건을 두고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강기훈은 이후 재심을 통해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유서 대필을 통한 자살 조장이라는 식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운동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연이어 정원식 밀가루 사건까지 터지게 되고, 노태우 정권은 일련의 사건을 기회로 강경 진압의 명분을 얻고 대대적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해서 위기를 탈출한다. 이후 분신 등 시위는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은 급격하게 위축된다. 같은 시기 소련 등 공산주의권의 붕괴도 운동권의 쇠퇴에 한몫했다.

한편 김지하는 오히려 운동권 동지·후배들이 칼럼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을 일방적으로 매도한다면서 엄청난 충격과 분노, 배신감을 느껴 정신병원 진료도 여러 차례 받았다고 한다. #

실제로 당시의 1991년 분신정국 사태는 지나치게 선을 넘은 행위가 아니냐는 여론이 더 강했고 6월 민주 항쟁을 통해 쌓은 민주화 운동가들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과격파 운동권들이 깎아내린 점이 컸다. 당장 김지하 시인 본인은 생사의 고비까지 넘기며 민주화를 위해 투쟁한 것에 비해 그를 배신자로 몰아간 90년대 초반 운동권이 민주화에 기여는커녕 노태우 정권의 자기합리화에만 기여한 것을 보았을 때 김지하 시인을 배신자로 매도할 자격이 있느냐라는 평가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김지하 시인이 당시 운동권의 자정작용을 요구함으로써 투쟁이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번지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의도로 해당 칼럼을 기고했으며, 이를 오해한 운동권이 김지하 시인을 되려 변절자로 매도해 그 충격으로 김지하 시인이 극우로 변질되었다고 바라본다.

 

고문 후유증설
1991년 김지하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굿판 칼럼'으로 운동권과 진보 진영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진보 진영에서도 여러 의견이 갈렸다. 그를 변절자라고 극렬히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가 70년대 민주화 투쟁의 아이콘이었을 뿐만 아니라 보수 정권으로부터 어떠한 금전적인 이익을 취한 정황이 없기 때문에 변절자라고까지 매도하는 것은 좀 지나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후 김지하의 이런 급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고문 후유증을 앓고 있으며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설이 대두된다. 급기야는 너무 심한 고문으로 외모까지 확연히 달라졌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자기 아들이 대학 진학 문제에 대해 다른 말을 한 적이 있어 기억이 오락가락하며 정신적으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것 외에도 과거 자신이 썼던 자서전적 내용과 이후에 주장하는 자신의 경험담이 일치하지 않는 점이 거론되기도 했다.

 

 

 당사자들의 주장
부인 김영주씨의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정권의 박해야 예상했지만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면서 요상한 일이 벌어졌다. 김 시인이 좌우 양편에서 박해를 받은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산 인간을 제물로 바치듯 좌파 일각에서 김 시인을 박정희 정권이 죽이도록 유도해 ‘민족의 제물’로 바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차츰 그 상황을 인식한 어머니는 사위를 살리기 위해 정권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용하게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남편은 어떤 의미에서는 장모 덕분에 살아남았다.”
“좌파의 색채는 여럿이다. 순수한 사람도 많지만 야심가도, 종북주의자도, 간첩도 있다. 돌아보면 민주화 과정에 악(惡)도 기여한 바가 있다. 온갖 세력이 합쳐야 민주화가 가능했다. 민주화했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때론 은밀하게, 때론 공개적으로 남편 속을 들쑤시고 마음에 상처를 줬다. 석방된 이후 20년 동안 12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젊은이들의 분신자살이 이어진 1991년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을 발표한 뒤엔 무슨 사회적 발언만 하면 못 잡아먹어 조직적으로 난리를 쳤다. 그 배신감과 원통함이 오죽했겠나.

문단 거물 고은의 성추문으로 시끄러운 와중에 조선일보와의 인터뷰 고은 “박경리에게 손자를 업고 시청 앞에서 김지하 석방 플래카드 들고 시위하라고 했더니 과부년 주제에 말을 안 들어. 하라고 하면 할 것이지”에서의 내용을 보면 고은이 김지하의 장모이기도 한 박경리 작가가 자신의 말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과부년이라고 비하한 것을 전해들었다는 증언을 했다. 그자리엔 당시 운동권 학생들의 사상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던 리영희나 문학계 거물인 백낙청도 같이 있었다고 한다.

 

 

말년
2001년 5월에 그는 <실천문학> 여름호에서 '죽음의 굿판' 발언에 대해서 10년만에 유감을 표명하였다.

2012년 11월 26일 열린 시국강연회에서 새누리당의 박근혜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민청학련 사건 재심으로 보상금을 수령했는데, 인터뷰에서 '돈'을 목적으로 재심을 신청했다고 발언했다. 자식교육 등으로 돈이 필요했다고. # 5월 26일, 법원은 15억 배상판결을 확정했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 밖에 문재인이나 안철수, 리영희, 백낙청 같은 인사들에 대한 원색적 비난 발언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래도 비난받은 인물 측에서 법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아 그냥 넘어갔다. 여기에 대선 포기 후 27억을 반납하지 않은 이정희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하였다.

민청학련 재심 이후 '오적 필화 사건'에 대해서도 항소하여 재심을 청구했으나 법원이 2013년 5월 9일 기각하였다. '재심 사유가 없는 반공법 위반 혐의의 유무죄를 새로 판단할 수 없다'는 법리상의 한계가 그 이유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시기 김지하 명의로 쓰여진 <김지하 시인의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등 세월호 특별법 비난글이 인터넷과 SNS에 유포됐으나, 실제로 김지하 본인이 쓴 글이 아니다. 이에 김지하 측은 2019년 관련 게시글 유포자나 단체에 법적대응을 하겠다고 밝혔다.

2018년 조선일보와 인터뷰한지 5개월 후,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것을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하였고, 촛불집회 ·미투 운동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는 비판적인 것으로 보인다.

2019년 11월 25일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이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김지하사망
2022년 5월 8일 향년 81세의 나이로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한 자택에서 사망했다. 고인은 최근 1년여간 암 투병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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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서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1975년에 발표된 김지하의 시. 당시 이 시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대학생과 지식인 등의 민중들에게 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 시가 쓰여진 1970년대는 민주주의 운동에 각종 탄압이 들어가고,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발표하는 매우 암울한 시기였다. 암담한 현실에 절규하고,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폭력적이고 반민주주의적인 사회현실에 대해 흐느끼는듯 하면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듯한 이 시의 분위기가 특징이다. 또 특히 민주주의를 '너'로 의인화시켜 표현한 점과 점층적인 운의 반복을 사용해 내재적 리듬을 형성함과 동시에 감정을 점층적으로 고조시킨 점도 특징이다.

 

'자유'와의 유사성 문제

 

 

 


이 시의 원형이라는 주장을 받는 작품이 존재한다. 프랑스의 시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이다.

 

 


한글번역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彫像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 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 위에
일상의 흰빵 위에
약혼 시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나의 하늘빛 옷자락 위에
태양이 녹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풍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멋없는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살포시 깨어난 오솔길 위에
곧게 뻗어나간 큰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켜진 램프 위에
불꺼진 램프 위에
모여 앉은 나의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나의 방 위에
빈 조개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나의 강아지 위에
그의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의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된 불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균형 잡힌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건네는 모든 손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초월한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댓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 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프랑스어 원문
Sur mes cahiers d’écolier
Sur mon pupitre et les arbres
Sur le sable sur la neige
J’écris ton nom

Sur toutes les pages lues
Sur toutes les pages blanches
Pierre sang papier ou cendre
J’écris ton nom

Sur les images dorées
Sur les armes des guerriers
Sur la couronne des rois
J’écris ton nom

Sur la jungle et le désert
Sur les nids sur les genêts
Sur l’écho de mon enfance
J’écris ton nom

Sur les merveilles des nuits
Sur le pain blanc des journées
Sur les saisons fiancées
J’écris ton nom

Sur tous mes chiffons d’azur
Sur l’étang soleil moisi
Sur le lac lune vivante
J’écris ton nom

Sur les champs sur l’horizon
Sur les ailes des oiseaux
Et sur le moulin des ombres
J’écris ton nom

Sur chaque bouffée d’aurore
Sur la mer sur les bateaux
Sur la montagne démente
J’écris ton nom

Sur la mousse des nuages
Sur les sueurs de l’orage
Sur la pluie épaisse et fade
J’écris ton nom

Sur les formes scintillantes
Sur les cloches des couleurs
Sur la vérité physique
J’écris ton nom

Sur les sentiers éveillés
Sur les routes déployées
Sur les places qui débordent
J’écris ton nom

Sur la lampe qui s’allume
Sur la lampe qui s’éteint
Sur mes maisons réunies
J’écris ton nom

Sur le fruit coupé en deux
Du miroir et de ma chambre
Sur mon lit coquille vide
J’écris ton nom

Sur mon chien gourmand et tendre
Sur ses oreilles dressées
Sur sa patte maladroite
J’écris ton nom

Sur le tremplin de ma porte
Sur les objets familiers
Sur le flot du feu béni
J’écris ton nom

Sur toute chair accordée
Sur le front de mes amis
Sur chaque main qui se tend
J’écris ton nom

Sur la vitre des surprises
Sur les lèvres attentives
Bien au-dessus du silence
J’écris ton nom

Sur mes refuges détruits
Sur mes phares écroulés
Sur les murs de mon ennui
J’écris ton nom

Sur l’absence sans désir
Sur la solitude nue
Sur les marches de la mort
J’écris ton nom

Sur la santé revenue
Sur le risque disparu
Sur l’espoir sans souvenir
J’écris ton nom

Et par le pouvoir d’un mot
Je recommence ma vie
Je suis né pour te connaître
Pour te nommer

Liberté.

이게 변형이냐 표절이냐 뭔가에 대해서 엄청나게 말이 많다. 일단 김지하도 타는 목마름으로가 자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까지는 부정하지 않는 상황.

그리고 사실 저 시의 영향을 받은 것이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만은 아니다. 김남주의 조국은 하나다 역시 유사성이 언급되고 있는 것.


조국은 하나다 -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양키 점령군의 탱크 앞에서
자본과 권력의 총구 앞에서
조국은 하나다

이제 나는 쓰리라
사람들이 주고받는 모든 언어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탄생의 말 응아응아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의 말 아이고아이고에 이르기까지
조국은 하나다 라고
갓난아기가 엄마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말
엄마 엄마 위에도 쓰고
어린아이가 어른들로부터 배우는
최초의 행동
아장아장 걸음마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나는 또한 쓰리라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든 길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고
기쁨과 슬픔을 나눠가지는 인간의 길
오르막길 위에도 쓰고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도 쓰고
파도로 사나운 뱃길 위에도 쓰고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

오 조국이여
세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이여 이름이여

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의 눈길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눈을 뜨면
아침에 당신이 맨 먼저 보게 되는
천정 위에도 쓰고
눈을 감으면
한밤에 맨 나중까지 떠 있는
샛별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축복처럼
만인의 배에서 차오르는 겨레의 양식이여

나는 쓰리라
쌀밥 위에도 쓰고 보리밥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바다에 가서 쓰리라 모래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파도가 와서 지워버리면 그 이름
산에 가서 쓰리라 바위 위에
조국은 하나다 라고
세월이 와서 지워버리면 그 이름
가슴에 내 가슴에 수놓으리라
아무리 사나운 자연의 폭력도
아무리 사나운 인간의 폭력도
감히 어쩌지 못하도록
누이의 붉은 마음의 실로
조국은 하나다 라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외치리라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벽에 대고
조국은 하나다 라고
아메리카 카우보이와 자본가의 국경
삼팔선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식민지의 낮과 밤이 쌓아올린
분단의 벽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압제와 착취가 날조해낸 허위의 벽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
조국은 하나다 라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내걸리라
지상에 깃대를 세워 하늘 높이에
나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키가 장대 같다는 양키의 손가락 끝도
가난의 등에 주춧돌을 올려놓고 그 위에
거재를 쌓아올린 부자들의 빌딩도
언제고 끝내는
가진 자들의 형제였던 교회의 첨탑도
감히 범접을 못하도록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

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남과 북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이 시들의 시대적 가치 때문에 이야기가 적고 당시의 의의 역시 퇴색될 수는 없겠지만, 영향관계와 이게 표절의 영역인지 영향의 영역인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는 주장도 조금씩은 나오고 있다.


김지하시 타는 목마름으로 

전3연 25행으로 이루어진 자유시로 내재율을 지니고 있다. 시의 제재는 민주주의이고, 주제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한 치열한 투쟁을 단호하고 의지적인 어조로 형상화한 비판적·저항적 성격을 띤 서정시이다. 민주주의를 '너'로 의인화시켜 표현한 점과 반복법과 점층법을 사용해 내재적 리듬을 형성함과 동시에 감정을 점층적으로 고조시킨 점을 표현상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제1연에서 시인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그를 위한 안타까운 투쟁을 이야기한다. 특히 '신새벽'과 '뒷골목'이라는 시어를 통해 시적 화자가 처한 암울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제2연에서 시인은 민주주의가 압살당하는 고통스런 현실과 많은 민주인사들이 체포 구금되는 억압적 시대상황을 여러 가지 소리의 중첩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3연에서는 암담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음을 노래한다. 여기서 '타는 목마름'이라는 시어는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과 비장한 결의를 드러내주는 핵심어이다. 특히 뒷골목에서 숨죽여 흐느끼며 타는 목마름으로 나무판자에 남몰래 '민주주의여 만세'를 쓴다는 대목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현실과 지식인들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김지하를 한국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한 이 시는 1970년대의 대표적 저항시이다. 추상적인 구호로 그치기 쉬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주제화한 이 시는 당시의 정치적 현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지만 상징적 시어를 통해 서정적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사회적 효용성을 뛰어넘어 문학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시와 작품의 분위기와 주제가 유사한 작품으로 폴 엘뤼아르(Paul Eluard)의 시 《자유》와 정희성(鄭喜成)의 시 《너를 부르마》(1975)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타는 목마름으로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1975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김지하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1982)에 수록되어 있다. 군사독재정권의 강압적인 통치에 맞서 민주주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담아 노래한 1970년대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10월유신'이라 불린 비상체제하의 질식할 듯한 시대적 상황을 개인적 서정으로 육화시켜 문학적 감성으로 선명하게 집약시킨 사회참여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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