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 조선 vs. 청나라 연도 : 1636~1637년 |
목차
17세기 초, 만주에는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웠어요. 당시 중국 땅을 차지하고 있던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5만의 군사를 보내어 조선을 도와준 후 힘이 약해지고 농민의 반란이 일어나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지요.
힘을 키워 명나라를 위협하던 후금은 조선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며 정묘호란을 일으켰어요.

명나라의 도시 랴오양을 공격하여 빼앗는 후금
광해군이 중립 외교로 후금의 침입을 막다
명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일어난 후금이 힘을 키우고 있을 때, 조선의 임금은 광해군이었어요. 광해군은 현명한 사람이었어요. 의리만 생각하여 망해가는 명나라를 무조건 돕다가는 후금이 중국의 주인공이 되는 날 후환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지요. 그래서 명나라에 지원군을 보내며 강홍립 장군에게 기회를 엿보라는 지시를 내렸어요.
강홍립은 광해군의 뜻을 알아채고 명나라를 도와주는 척하다가 후금에 투항했어요. 이런 탁월한 중립 외교 덕분에 광해군 때에는 후금의 침입이 없었어요.

후금 장수의 모습
후금이 형제 관계를 요구하며 정묘호란을 일으키다
그런데 광해군이 도덕적으로 큰 잘못을 저질렀어요.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로 유배 보낸 후 죽음에 이르게 한 거예요. 광해군과 반대파인 서인들은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렸어요. 이것이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이에요.
인조는 금을 배척하고 명과 친하게 지내는 '친명배금' 정책을 취했어요. 또 후금이 차지하고 있던 요동 지방을 되찾기 위해 평안북도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를 몰래 지원했지요. 명나라와 경쟁 관계에 있던 후금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그런데 때마침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남은 무리들이 후금을 찾아가 '지금이야말로 조선을 칠 때다.'라며 조선을 칠 것을 부추겼어요. 후금은 이러한 것들을 구실 삼아 형제 관계를 요구하며 전쟁을 일으켰지요. 이것이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이에요.
3만 군사를 앞세운 후금은 압록강을 건너 황해도까지 침입했고, 인조는 할 수 없이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었어요.
잠깐! 이괄의 난이란?
인조반정에서 인조를 왕에 즉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이괄이 높은 벼슬을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일으킨 반란이에요. 이괄의 군대가 평안도부터 한양까지 점령하여 인조는 공주까지 피신해야 했어요.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 병자호란을 일으키다
1636년, 조선에 다시 큰 위기가 닥쳤어요. 중국의 주인이 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있는 청나라의 태종이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며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기 때문이에요. 태종은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와 조선을 공포에 몰아넣었어요. 이것을 '병자호란'이라고 해요.
조선의 조정은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파와 화약을 맺고 훗날을 기약하자는 주화파로 나뉘어 팽팽히 대립했어요. 결국 척화파의 주장이 우세한 가운데,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왔지요. 임경업 장군은 백마산성에서 철벽 수비를 하였지만 청나라 군대는 우회하여 한양 근처까지 들어왔어요.

백마산성을 지켜 내는 임경업 장군과 군사들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하다
인조는 먼저 왕세자와 왕실 가족을 강화도로 피신시키고 후에 강화도로 가려 했어요. 그러나 이미 한양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온 청군에 길이 막혀 갈 수 없었지요. 인조는 한양을 지키는 요새 중 하나였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어요. 남한산성에는 50여 일분의 식량과 1만 3천여 명의 군사밖에 없었지만, 인조는 45일간 청나라와 맞서 싸웠어요.
그런데 강화도가 함락되어 왕실 가족이 모두 인질로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인조는 할 수 없이 남한산성을 나와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정했어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다
인조는 한겨울에 먼 길을 걸어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있는 청 태종에게 갔어요. 그곳에서 인조는 항복의 표시로 3배 9고두를 해야 했지요. 3배 9고두란 상복을 입고 3번 큰절을 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꽝꽝 박아, 절하는 소리가 단 위에 앉아 있는 청 태종의 귀에 들리도록 하는 청의 인사 방식이에요.
이것을 하다가 인조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어요. 그렇게 조선은 청의 신하가 되었고, 항복의 대가로 엄청난 배상금과 함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척화파 신하들과 20만 명의 백성을 청에 인질로 보냈어요.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는 모습
인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오랫동안 청에 잡혀 지냈기 때문에 청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컸어요. 조선의 백성들도 청에 엄청난 양의 공물을 바치느라 불만이 높았지요.
이에 효종은 '청나라를 쳐서 원수를 갚겠다.'는 북벌 운동을 일으켰어요. 그러나 북벌 운동은 효종이 병으로 죽으면서 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어요.

[네이버 지식백과] 병자호란 - 조선의 굴욕으로 이어진 두 달 간의 전쟁 (재미있는 전쟁 이야기, 2014.12. 5., 양오석, 조봉현, 권성호, 서울대학교 뿌리깊은 역사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