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저자 : 헨리 나우웬
출판사 : 두란노
* 거룩한 독서
성경을 거룩하게 읽는 것은 '무릎을 꿇고', 곧 하나님께서 내 독특한 상황에 주실 말씀이
있음을 굳게 믿고 경청하는 자세로 읽는다는 뜻이다.
변화를 갈망하는 열린 마음, 원하지 않는 곳으로 인도하셔도 따르겠다는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자기에게 향한 것이라고 받아 묵상했을 때 삶이 온전히 달라졌다.
* 침묵
하나님의 말씀은 침묵 속에서 그리고 침묵을 통하여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고, 거기에
서 우리는 말씀을 되새김질하고 곱씹고 소화하여 내 속에 살과 피가 되게 한다. 침묵이
없으면 말씀이 우리 내면의 길잡이가 될 수 없다. 묵상이 없으면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집을 짓고 그곳에서 말할 수 없다.
* 공동체 생활
영성 계발에는 마음을 향한 내적 여정만이 아니라 마음에서 공동체와 사역으로 나아가는
외적 여정도 필요하다. 기독교 영성은 본질상 공동체적이다.
공동체에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서로 용서를 구하는 법을 배운다.
* 자유에 이르는 길
하나님 존전에 머무는 고독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는 공동체로 그리고 다시 모두를
향한 사역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마음의 길은 진리에 이르는 길이다.
진리의 영은 우리를 속박하는 무지와 망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신다.
무지는 우리로 하여금 수용을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 수용을 구하게 하고 변화를 얻을 수
없는 곳에서 변화를 바라게 한다.
망상은 마치 우리 힘으로 새 세상을 만들고 지배할 수 있다는 듯이 그것을 위하여 싸우게
하고 마치 우리가 최종 심판자인 것처럼 이웃들을 비판하게 한다.
무지와 망상은 우리를 세상에 옭아메고 고난과 슬픔을 야기한다.
1. 불투명에서 투명으로
삶의 커다란 신비와 한계 앞에서 우리의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 틀 안에 가둘 수 없는 하나님
신학자 또는 사역자는 하나님을 우리의 작은 생각과 기대 정도로 좁히려는 보편 성향을
지적하는 것과 하나님이 계시될 수 있도록 생각과 마음을 열라고 촉구하는 것뿐이다. (유
식한 무지)
우리는 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기꺼이 자신의 잔을 비워야 하고,
사람들을 대할 때 내 경험을 기준으로 사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 (수용하는 빈 마음)
영성계발 : 자신을 비우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과정
* 흐릿한 것을 걷어 내는 관상 기도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투명해진다.
관상하는 삶이란 불투명에서 투명으로, 즉 사물이 흐릿하고 탁하고 막히고 닫혀 있는 자
리에서 동일한 사물이 투명하고 뚫려 있어 그 너머 멀리까지 보이는 자리로 끊임없이 이
동하는 삶(통제의 망상, 우리를 소유하려는 재물의 속성, 거짓 자아의 가식 등)
1) 자연이 투명해지다.
2) 시간이 투명해지다.
시간은 '크로노스(순서대로 흘러가는 시간)'에서 마음이 변화될 기회인 '카이로스'로 바뀌
어야 한다.
믿음으 눈으로 우리는 인생의 사건들에서 배울 수 있고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것을 하나
님의 손에서 건네받을 수 있다. 힘들고 괴로운 시간들도 얼마든지 배움의 기회가 된다. 그
시간들은 우리를 본연의 모습으로 빚어주고 치유와 구원 되신 하나님께로 이끈다.
3) 사람들이 투명해지다.
우리에게 가장 큰 유혹은 사람을 가려서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의 영적 과제는 동료 인간들을 성격과 특징의 상자 안에 넣으려는 유혹을 물리치고
그들을 자기 자신이 익히 아는 것보다 더 크고 본질적인 실체를 보여 주는 인격체들로 보
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사랑, 우리가 설명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은 진리, 우리가 담아낼 수 있는 것보다 더 풍부한 아름다움을 전해 주는 인
격체들이다.
사람들이 이기적인 목적을 채우거나 거기에 써먹을 도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담아 낼
수 있는 것 이상이신 분들 전달해 주는 매개체로서의 인격이 되며, 그들은 진정으로 사랑
받고 보호 받고 이해 받을 수 있다.
사역이란?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밝아지도록 상대
에게 세상을 좀 더 투명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2. 망상에서 기도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이렇게 아뢰는 것이다. "저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입니다. 저
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저의 가치가 아니라 아버지의 가치입니다. 저의 영광이 아
니라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저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됩니다.
고요한 중심이 없는 삶은 쉽게 망상에 빠진다. 내 활동의 결과물을 자아 정체감을 확인하
는 유일한 길로 보고 거기에 집착하면, 내 거짓 정체들에 대하여 소유하려 들고 방어하기
급급하며 의존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고독한 기도 중에 우리는 그런 소유와 의존이라는 망상의 가면을 벗고 나라는 사람이 내
가 통제하거나 정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남들과 소통하도록 위로부터 주어진 존재임
을 중심으로 깨닫는다.
나의 정체가 성취나 소유에 달려 있지 않고 나를 규정하는 것이 생산성이 아니며, 나의
가치가 유용성과 같지 않음을 우리는 잠잠히 기도하며 알게 된다.
1)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허비하는 것
기도는 다른 일들로 바빠지는 대신 하나님과 함께 한가해지는 것이다. 기도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유용하거나 생산적인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유용성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건 곧 기도가 중요한 결실을 나타내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이루신 결
과임을 상기하는 걸 의미한다.
나는 하루를 시작할 때 내 수고에 열매를 주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에서 시작하며,
일의 주관자가 나인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2)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것
3)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는 것
4)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
3. 슬픔에서 기쁨으로
상실의 고통을 내 마음속에 들여 놓는 것, 용기를 내서 내 상처를 느끼는 것, 울며 아파하거나 소
리쳐 따질 수 있는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 기쁨을 만날 수 있는 내면의 자리로 인도 받는 모험을
감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애통이다.
인생의 슬픔을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상실'이다. 삶이란 때로 끝없는 상실의 연속
처럼 보인다. 세상에 태어나면 나이가 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님을 향한 사랑, 가족들과
친구들에 대한 신뢰, 인생의 희망 같이 그토록 오랜 세월 당신을 떠받쳐 준 것들이 시들해졌음을
알게 된다.
1) 상실을 애통하라
슬퍼한다는 것은 곧 내 삶의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고 확실하거나 안정된게 없이 모든게
변하고 바뀌고 캄캄한 심연을 직시하는 것이다. 충분히 슬퍼한다는 것은 상실을 계기로
거짓 안전감과 안전감을 벗어 버리고, 내가 망가진 존재이며 하나님 한 분 밖에 의존할
데가 없다는 고통스런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2)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너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너와 함께 있고 싶어. 궂은 일에 대해서 빈말로
위로하지 않을께.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말도 하지 않을거야. 지금 여기 네 곁에서 이
렇게 말하고 싶어. '그래 많이 아프지? 하지만 넌 혼자가 아니야'
4. 원망에서 감사로
"포도원 일꾼들의 동일한 품삯 내용 토대로"
오랜 기간에 걸쳐 이 비유를 묵상하면서 나는 내가 독선적이라는 사실과 신앙의 포도원에 일찍
온 나 같은 사람과 똑같은 품삯을 받는 지각생들 때문에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달았
다. 나를 한 없이 사랑하시는 분이 시켜 주신 일을 형제자매들과 함께 온 종일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나는 잘도 잊어버린다. 주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후한 마음을 나는 무엇 때문
에 즐거워하지 못하는가? 또한 내가 받는 것과 그들이 받는 것을 왜 나는 감사하지 못하는가? 남
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자리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깊은 회심의 한 시작점이다.
1) 원망의 위험성
원망은 하나의 격정이다. 의지했던 사람들과 단체에 대하여 분노와 좌절을 느끼게 하고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일련의 '불만'이다. '격정(passion)'이라는 말의 본뜻은 '고통
(Pathos)'이며, 사리에 맞게 행동할 수 있는 힘이 불가항력의 감정 때문에 꺽이는 것이다.
때로 이 무력감은 대상 모를 격노나 무차별 폭력으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대개는 갑갑하
고 강박적인 원망의 길로 빠진다. 원망이 비록 분노가 폭발하는 것보다는 덜 무섭고 덜
가시적이어도 파괴성은 그에 못지 않다.
분노가 얼마나 뜨거운지는 누구나 안다. 심리학에서 말하듯이 자신의 성난 감정을 대면하
고 명명하고 때로 쏟아 내면 분노가 꽤 위력을 잃는다. 자신의 분노를 '분석'하고 화나는
이유들을 파악하고, 상처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푸는 것이 좋다. 이런 작업으로 거품을 빼
면 분노가 우리 마음에 둥지를 틀지 못한다. 그러나, 성난 감정을 표출하지 않고 꽁하면
원망이 자리를 잡는다.
원망은 차가운 분노다. 뜨거운 분노가 차가워지면 마음이 무정해지고 삶이 엉망이 된다.
원망은 당신을 의심과 냉소와 우울에 빠뜨린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면 원망은 하나
의 존재 양식이 된다.
차가운 분노를 품고 사는 이들이 우리 중에 많다. 차가운 분노는 삶이 나를 실망시켰고
내 고난이 억울하며, 내 불만이 속수무책이라는 깊은 감정이다. 원망은 삶의 가장 못돼먹
은 속성 중 하나이다. 대인관계와 공동체 생황을 아주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원망은 용
서를 구하지 못하게 하며 기쁨을 사라지게 한다. 창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앗아
간다. 부정적인 감정들을 정체감을 얻는 유일한 딜로 보고 거기에 집착하게 만든다. 그러
다 우리는 자기가 싫어하는 바로 그런 존재가 되고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는 알량한 만
족감으로 퇴행한다. 바로 이 격정에서 우리는 해방 되어야 한다. 그래야 감사하는 삶을 살
아 갈 수 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사람들을 섬기려는 열망이 뜨거운 사역자들, 사람을 돕는 일을 직업
으로 하는 사람들이 특히 원망에 빠지기 쉽다. 이들은 이용당하는 기분을 자주 느끼는데,
그것이 원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불만에 집착하면 마음에 원망이 차서 하나님이 들어와 당신을 해방시켜 주실 공간이 없어
진다. 원망은 성령의 역사를 억제하고 내면의 하나님 나라를 축소시킨다. 원망은 믿음, 소
망, 사랑을 두려움, 의심, 경쟁심으로 바꾸어 놓는다. 분노와 원망으로 반응하느냐 사랑과
감사로 반응하느냐는 하늘과 땅 차이다.
2) 감사는 태도
원망의 반대는 '감사'다. 감사는 이따금식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이상이다.
감사는 태도다. 그 태도 때문에 우리는 분노를 버리고, 내가 섬기는 사람들에게 감춰져 있
는 선물을 받고, 그 선물을 공동체에 드러내 축제를 벌일 수 있다. 축제와 사역의 핵심에
감사가 있다.
3) 감사가 자라는 공동체
원망이란 바로 삶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불만, 내 많은 목표와 프로젝트가 올해와
오늘과 지금의 사건들에 방해받는다는 불만, 어쩔 수 없이 우연한 사건들과 우발적인 일
들의 수동적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불만이다.
감사로 이행하려면 하나님이 역사의 하나님이시며 일들이 조용하고 느리게 의당 풀려야
하는 대로 풀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내 영적 과제는 벌어지는 모든 일을 듣는 법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고 계심을 믿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삶이 내
스케쥴과 계획에 대한 방해거리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내심과 목적을 가지고 하루
하루 나를 빚으시고 인도하시는 장이 된다. 감사는 방해거리를 초대로, 불평의 빌미를 관
상의 순간으로 바꾸어준다.
4) 모든 것이 은혜
그렇게 두려워 하지 마라. 네 삶의 모든 것을 선물로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감사하라. 네
삶에 기쁨의 자리를 더 내라. 돌들이 떨어져 나가게 두고 감사하라. 네 안전지대를 벗어나
신뢰하라.
원망은 돌을 깎아 내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지 못하게 우리 눈을 가리지만, 감사는 그 과
정을 알아보게 해 준다. 즉, 느리지만 확실하게 우리가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빚어지고
있고 내 고통을 남들을 위한 치유의 소재로 내놓을 줄 아는 사람으로 준비되고 있는 것이
다.
감사는 간단한 감정이나 쉬운 태도가 아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체적인 방식
으로 끊임없이 주장해야 하는 힘든 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부당하고 버림받은
경험들, 상실감과 패배감을 직시하게 하시고 점차 그 안에서 우리 마음을 정화하시어 더
깊은 사랑과 더 굳건한 희망, 더 넓은 믿음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라고
도전하신다.
5.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우리가 자신의 정체감을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나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에서
찾는 한, 우리는 악착같이 서로에게 매달리게 된다. 그럴수록 우리는 두려움에 차게 된다. 기도는
이 모든 두려움의 집에서 나와 사랑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1)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는다.
인간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나는 두려움의 부정적인 위력에 압도된다. 두려움 없는 삶이
어떤 기분일지 더는 모를 정도로 두려움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배어든 것처럼 보일 때
가 많다. 두려움은 우리 개인의 몸과 공동체에 두루 퍼진다. 생각과 말과 행동의 동기가
두려움인 사람들이 허다하다. 우리는 자신을 생각해도 두렵고 이웃들을 생각해도 두렵다.
뭔가 나쁜 일이 벌어질까 봐 두려운 것이다.
두려움이 우리 삶에 두루 퍼지면 우리는 두려움의 집에서 세상을 내다보게 된다. 두려움
의 창에서 보이는 것은 소외와 결핍이다. 힘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은 흔히 두려움을 이용
하여 내면에 긴장을 조성하고 우리를 분열시킨다.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
면 능히 자기네가 시키는 대로 하게 만들 수 있다. 두려움은 우리를 지배하려는 이들의
손에 들린 가장 성능 좋은 무기다. 두려움에 갇혀 있는 한 우리는 말과 행동은 물론 생각
까지 노예처럼 변할 수 있다.
2) 은혜의 초대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도 그 사랑에 동참하여 사
랑의 근원이신 분과 친밀하게 사는 법을 배우도록 초대받았다. 이렇듯 이 참된 소속의 친
밀한 자리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어 주신 자리다. 그
분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장막을 치셨고, 자기 집에서 살자고 우리를 초대하셨고, 우리가
거할 방을 예비하셨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데, 그 예수님이 우리의 집이 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그분은 우리도 그분 안에 거하게 해 주신다. 우리 자아의 내밀한 심연 속에
들어오심으로 그분은 우리에게도 그분과 하나님의 친말함 속에 들어갈 기회를 주신다. 우
리를 자신의 참 거주지로 택하심으로써 그분은 우리도 그분을 참 거주지로 택하도록 초대
하신다.
3)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은 그분의 사랑의 집에 살자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기도는 두려움의 집에서 나와 사랑의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삶
의 기초를 대인관계에만 두는 데서 오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기도는 두려움에 찬 세상에서 불안 대신 사랑을 선택하고 마음 문을 열어 우리를 사랑하
시는 분의 친밀한 임재 안에 거하는 방법이다. 외부 상황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랑에 에워싸여 산다. 그 사실을 영적 차원에서 깨닫기 시작하면, 우리 생각 언
저리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다. 안팎으로 두려움, 불안, 염려, 집착을
경험하지 않는 날은 우리 인생에 거의 하루도 없다. 하지만 두려움 속에 살 필요가 없다.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일 4:18)
4) 날마다 사랑의 집에 거하기
주님의 집은 만인을 위한 사랑의 집이다. 사랑의 집에는 안전과 친밀함과 환대의 공동체가 있다.
우리는 사랑의 집에 살 때 정의를 시행하며 사역에 열매를 맺고 화평을 이룰 수 있다. 거기서 우
리는 두려움 없이 자유로이 존재하고 기동하고 신뢰하고 사랑한다.
6. 배척에서 포옹으로
고독한 기도처럼 진정한 공동체도 하나의 마음의 자질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공동체가 시
작되어야만 제대로 된 공동체적 삶이 가능해진다. 이 신앙 공동체는 모든 사람을 포용한다. 우리
가 보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까지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은 나 혼자만의 하나님
이 아니다.
1) 진정한 손대접
2) 우리는 다 같은 인간이다.
3) 공동체의 영적 친밀함
4) 모든 사람을 껴안는 공동체
* 거룩한 관찰
기도한다는 것은 곧 모든 삶과 사랑의 중심부로 옮겨 가는 것이다. 중심축은 내게 중심부
에서 사는 삶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다. 사역할때 우리는 바깥 테두리를 따라 뛰면서 모든
사람에게 닿으려고 할 때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중심축에서 시작하라. 중
심축에서 살라. 그러면 모든 바퀴살과 연결될 테고, 그렇게 바삐 뛰어다니지 않아도 된다.
바로 그 중심축, 즉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우리는 공동체로 부르시는 음성을 듣는다. 혼
자 기도할 때 나는 내 마음속으로 들어가 거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고, 그분은 내게
만인을 위한 사랑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록 나는 인류 가족과도 더 가까
워진다. 그리고 거기, 바로 그곳이 내 모든 형제자매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서로 만나는
곳임을 알게 된다.
고독은 언제나 우리를 공동체로 부른다. 공동체는 고독과 고독이 입 맞추는 곳이요. 릴케
의 말대로 "고독이 서로 인사하는" 곳이다. 고독한 기도 중에 나는 내가 인류 가족의 일원
이며 그 가족과 함께 있고 싶고 더불어 사역하고 싶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퀴를 굴림으
로써 나는 교제에서 공동체로, 다시 사역으로 움직인다.
7. 죽음을 부정하는 것에서 죽음과 친구가 되는 것으로
가족이나 교회가 당신을 사랑했든 사랑하지 않았든, 당신에게 도움을 주었든 상처를 주었든, 그전
부터 당신은 하나님께 온전히 사랑받았다. 당신이 온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당신이 영원히 하나님
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한 진리다. 그것이 당신이다.
1) 자신의 죽음과 친해지라
삶의 고통스러운 면을 회피하거나 부정하거나 억압하려는 나 자신 및 다른 사람들의 성향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그 성향은 언제나 신체적, 정신적, 영적 재앙을 부른다. 죽음과 친해지는 건 다른
모든 형태의 친해짐의 기초가 아닐까 싶다. 죽기 전에 우리가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죽음과 친구
가 될 수 있다면, 죽음을 위협적인 원수가 아니라 낯익은 손님으로 대할 수 있다면, 두려움과 죄
책감과 원망이 한결 더 없어질 것이다.
2)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
일단 죽음을 위협적인 원수가 아니라 낯익은 친구로 대하게 되면 우리는 많은 의심과 두
려움을 벗고, 죽을 운명을 직시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이라는 지식과 자유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오래전부터 알던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사랑받는 자라는
진리를 수시로 다시 주장해야 한다.
질병과 죽음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자유를 앗아가며, 온갖 위협과 약속으로 우
리를 조종할 힘을 사회에 부여한다. 두려움을 넘어 우리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그분께 이르면, 압제와 박해와 죽음조차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모든 형태의 악과 질병
과 죽음은 우리에 대한 최종 지배권을 잃는다. 우리는 깊은 내적지식, 머리보다는 가슴의
지식에 이른다. 즉, 우리가 사랑으로 태어나 사랑 속에 죽을 것이고, 우리 존재의 모든 부
분이 사랑에 깊이 뿌리박고 있으며, 사도 바울의 사뭇 웅장한 말처럼 아무것도 우리를 하
나님의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지식에 도달한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사랑받았고 죽은 후에도 사랑받을 것을 믿는다면, 당신은 인생의
사명을 깨달을 수 있다. 당신은 잠깐 동안 이 땅에 보냄 받았다.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세상에 보냄 받은 목적은 형제자매들에게 그들도 당신만큼 사랑받는 자이며 우리
가 다함께 하나님 가족에 속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다.
3) 다시 어린아이 되기
노인들은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내 경우,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 했다. 유년기를 다시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최대한 독립성을 유지하려는 우리의
본능적 욕구에 반대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잘 죽으려면 반드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제2의 유년기에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은 제2의 유년기에 대하여 이렇게 말
씀하셨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
리라"
영원에 비추어 제2의 유년기의 특징은 무엇일까?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의존이
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어릴수록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야 살아갈 수 있다. 또한 늙어갈수
록 역시 곁에 사람들이 많아야 살아 갈 수 있다. 의존에서 의존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앞으로도 누군가 내 죽음의 산파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태어날 때 혼자가 아니었듯이
죽을 때도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죽음의 시기와 방법에 대하여 누구나 기대할 수 있다. 남편이나 아내, 친구들과 가족들이
곁에 있으면 좋을 것이다. 상담자나 목사가 곁에 있어도 좋다. 혼자가 아니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결국 우리에게 두려움 없이 죽음을 통과할 영적능력을 줄 수 없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도의 교통에 동참하는 것만이 우리를 저편으로 평안히 데려다 줄 수
있다.
4) 하나님을 신뢰하고 성도의 교통을 믿으라
* 삶이란 아주 간단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이 있을 때 친구에게 털어놓으면 그것이 아주 작아지거
나 아예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을 적으로 보면 우리는 부정 상태에 들어가 최대한
거기서 멀어지려고 하지요. 죽음이 이생에서 영생으로 가는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믿는 우리 신앙
인들은 죽음을 친구로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