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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주인공 김옥균 은 누구인가

아이루스 2023. 2. 3.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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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은 어떤 인물일까?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
금강 북쪽과 차령(공주에서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로 넘어가는 해발 190미터의 고개) 남쪽에는 기름진 땅이 많고 지금은 밤의 주산지로 알려졌는데, 그 정안면에서 대한제국 말의 개혁사상가 김옥균  이 태어났다.

후세 사람들로부터 ‘대한제국 말의 풍운아’, ‘비운의 주인공’, ‘미완성의 영도자’라는 평가를 받는 김옥균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주인공이다. 갑신정변은 1884년(고종 21)에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지만, 성공한 지 3일 만에 막을 내려 ‘3일 천하’라는 말을 회자시키고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간 사건이다.

대한제국 말의 문장가인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김옥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김옥균을 포경사(捕鯨使)에 임명하였다. 김옥균은 장동 김씨의 변두리 일가로 그의 양아버지 김병기는 음직으로 부사에 이른 사람이다. 김옥균은 약간 재능이 있었는데, 과거에 오른 지 10여 년이 지나도록 벼슬길이 열리지 않아 태서학(泰西學)을 연구하여 부강 정책을 떠벌리며 명예를 구하려고 하였다. 박영교와 그의 동생 박영효, 이도재, 신기선, 서광범, 홍영식 등은 서로 어울려 작당하여 그를 영수로 추대하였다.

그는 점차 임금에게 알려졌는데, 마치 기이한 재주와 능력이 있는 것처럼 비춰져 임금이 그에게 경도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특별히 포경사를 설치하고 먼저 김옥균을 임명하였다. 서양인들은 고래를 잡아 많은 이익을 얻었고 일본인들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무단히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었는데, 김옥균은 방문도 나가 보지 않고 혓바닥으로 고래의 이익을 만들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공주시 정안면의 김옥균 생가는 터가 없어지고 감나무만 서 있던 자리에 1989년 생가 터를 다듬고 바로 앞에 추모비를 세웠다.
김옥균은 1851년 지금의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김병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이 안동이고,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또는 고우(古愚)이다. 3세 무렵 그의 가족은 지금의 천안시 광정면 원대리로 이사했고, 그의 아버지는 훈장 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7세 때 재종숙인 김병기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1세(1861년)에 양부인 김병기가 강릉부사가 되어 강릉으로 가게 되자 양부를 따라 강릉으로 가서 16세 때까지 율곡 이이의 사당이 있는 서당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김옥균은 학문뿐 아니라 문장과 시, 글씨, 그림, 음악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였다. 갑신정변의 동지였던 박영효는 “김옥균의 장처(長處)는 교유(交遊)라고 할 수 있소. 교유가 참 능하오. 글 잘하고, 말 잘하고, 시 잘 쓰고, 글씨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오”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다재다능했는지를 알 수 있다.

김옥균의 주위에는 일찍부터 당시의 명문 귀족 출신 수재들이 모여들었다. 그중 철종의 사위인 금릉위 박영효와 당시 영의정이던 홍순목의 둘째 아들인 홍영식, 고종의 외척이며 여흥 민씨 가문의 총아인 민영익 그리고 서광범, 서재필 등이 김옥균이 교류하던 양반 출신 청년 지식인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김옥균은 1870년대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게 되었고, 이들이 훗날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아홉 명이 일본으로 망명함으로써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말았고, 그들 중 몇몇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김봉균ㆍ이희정ㆍ신중모ㆍ이창규 등은 모반, 대역부도의 죄로 지금의 서울시청 부근인 군기시 앞에서 능지처참되었고, 이윤상과 이점돌은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으며, 차홍식ㆍ서재창ㆍ남홍철ㆍ고흥종ㆍ최영식은 불고지죄로 서소문 밖에서 목숨을 잃었다.

김옥균의 동생인 김각균은 천안에서 살다가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오다가 형이 정변을 일으켜 실패하고 도망쳤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날로 경북 칠곡으로 도망쳐 숨어 살다가 어사 조병로에게 붙잡혀 대구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김옥균의 아버지 김병기는 당시 눈병을 얻어 장님이 되었는데, 천안 감옥에서 6~7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연좌제에 의해 효수되었고, 어머니 송씨 부인은 누이와 함께 음독자살하였다. 김옥균의 처와 젖먹이 딸은 양가파연(養家破緣)의 처분으로 죽음은 모면하였지만 관비가 되어 온갖 고생을 하다가 죽었다.

단 한 사람 예외가 김옥균의 누이동생인데, 그녀는 위계결혼(僞計結婚)으로 포리(捕吏)의 눈을 속여 타고난 수명을 다하였다. 갑신정변 당시 기계국의 주사였던 남편 송병의와 함께 서울에서 살던 김옥균의 누이동생 김균은 남편과 함께 충청도 옥천군 청산면으로 몸을 피하였다.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여동생은 포승의 치욕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를 것이라 생각하고 비상을 마셨다. 그녀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소문이 인근에 파다하게 퍼졌다. 하지만 균은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남편은 아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사람들에게 상처했다는 것을 알리고 송장 없는 초상을 치렀다. 정부는 물론이고 일가친척들까지도 김균이 죽었음을 믿었고 김균은 곧바로 영천의 신녕(新寧)으로 몸을 숨겼다.

1년이 지난 뒤 송씨는 새장가를 들었다. 혼례 날 신부는 유난히도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며,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송씨는 천안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누구도 송씨가 새장가를 든 여인이 김옥균의 누이인 균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그녀는 충남 서천군 동면 판교리에서 60여 년 간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그것은 당시의 혼인 풍습이 여자는 시집을 가면 대문 밖을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918년 박영효가 일본에서 김옥균의 머리카락 몇 올을 가지고 돌아와 김옥균의 무덤을 쓸 때의 일이다. 박영효가 제문을 읽다가 목이 메어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있는데 머리가 하얀 할머니가 무덤 앞으로 다가오더니 무덤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하였다. 바로 김옥균의 누이인 김균이었다.

금강 북쪽과 차령 남쪽에는 기름진 땅이 많고 지금은 밤의 주산지로 알려졌는데, 그 정안면에서 대한제국 말의 개혁사상가 김옥균이 태어났다.
한편,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와 아버지인 참판 박원양은 자살을 택했는데, 그는 죽기 전에 10살 난 영교의 아들을 먼저 죽였다. 박영효의 둘째 형인 진사 박영호는 변성명을 하고 전북 진안의 산중에 숨어 있다가 청일전쟁이 끝난 후 하산하여 죽임을 면하였다.

홍영식의 아버지로 임오군란 무렵 영의정을 지냈던 홍순목은 “역적을 지금껏 자식으로 기르면서 몰랐으니 만 번을 죽더라도 어떻게 속죄를 하겠는가” 하고 탄식한 뒤 홍영식의 10살이 채 안 된 아들을 보며 “이 종자를 어떻게 남겨두겠는가” 하고는 독살하고 대궐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한 다음 독약을 마셨다. 홍영식의 처 한씨도 홍영식의 형 홍만식의 권고를 받고 자살하였다.

서재필의 아버지인 진사 서광언은 아내와 함께 자결했으며, 서재필의 처와 자식은 독사하였다. 형 재형은 은진 감옥에서 죽었고, 동생인 서창필은 처형되었으며, 재우는 훗날 사면되었다.

서광범의 아버지인 서상익은 연루된 죄로 7~8년간 유배되었지만 무슨 이유로 죄를 받는지조차 몰랐다. 서광범의 아내 김씨는 끝까지 절개를 지켜 갑오년 이후 광범과 다시 살게 되었다.

유대치는 제자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하는 것을 보고 ‘시기가 너무 이르다’며 만류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김옥균 등이 도망을 치자 그들과 함께 두었던 바둑판을 도끼로 쪼개어 아궁이에 밀어 넣은 다음 수표교에 있는 약국에서 행방을 감추었다.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들리는 말로는 오대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고 한다.

갑신정변의 행동대장 격이던 신중모는 참형되었고, 윤영관은 보부상들에게 잡혀서 참살되었으며, 박제경은 수표교에서, 오감은 관철교 부근에서 일반 시민에게 붙잡혀 참살되었다.

한 집안에 역적이 나면 삼족이 죄가 있건 없건 연루되어 풍비박산이 되는 것이 조선시대의 비극적인 형벌이었다. 개화로 인하여 파생한 이러한 비극적인 사태를 목격하고도 당시 사람들은 동정은 고사하고 개화잡귀들은 씨를 말려야 한다고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김옥균
1851(철종 2)-1894(고종 31). 조선 말기의 정치가, 개화운동가. 갑신정변을 주도한 인물이다. 한국민속홍보센타 제공.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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