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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 히루부미

아이루스 2022. 12. 25.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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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근대 일본 건설과 한국 병탄의 기초 구축한 정치가

[ 伊藤博文 ]



요약 이토 히로부미는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에 활동한 정치가이다. 무사 지위도 얻지 못한 하급 신분이었지만 본인의 역량과 좋은 스승, 주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일본의 초대 수상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존왕양이 활동을 하다 영국 유학을 거치면서 개국론자로 변신, 이후 일본의 개국과 식산흥업을 통한 부국강병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근대 독일을 국가 모델로 삼아 각종 정책 및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다. 45세에 초대 총리가 되어 천황 아래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였지만 독단적인 국정 장악과 운영으로 많은 적을 만들었다. 정계의 중심에서 물러난 후엔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으로 한국 병탄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러시아 방문 중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하여 사망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출생 - 사망
1841년 10월 16일 ~ 1909년 10월 26일
시대
에도 시대 - 메이지 시대
직업
정치가, 관료
가문
하야시(林) 가문 → 이토(伊藤) 가문
부모
부 : 하야시 주조(林十蔵)
모 : 고토코(琴子)
배우자
이토 우메코(伊藤梅子)

출생과 성장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9월 2일 조슈(長州) 번의 스오(周防) 국 쿠마게(熊毛) 군 쓰카리무라(束荷村)에서 농민 하야시 주조(林十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주조는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고자 가족을 데리고 하기 지역의 번화가로 이사하였고, 히로부미는 1854년 조슈 번의 하급 병사인 이토 나오에몬(伊藤直右衛門)의 양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집안은 이토(伊藤)의 성을 사용하게 되었고, 이후 생계도 어느 정도 안정되면서 시를 배우거나 글자를 익히는 등의 공부를 할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이름을 히로부미(博文)로 개명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이다.

1856년, 16세의 이토는 번의 명령으로 사가미(相模) 지역의 해안경비 임무를 맡아 조슈 번 안팎에서 문무에 통달한 무사로 유명했던 구리하라 료조(来原良蔵)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여기에서 료조는 히로부미의 재능이 뛰어남을 깨닫고는 근무하는 틈틈이 한문으로 된 서적을 가르쳤다. 이듬해에 히로부미가 번으로 돌아가게 되자 료조는 친구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에게 추천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히로부미는 구리하라 료조를 평생 동안 스승으로 받들게 된다.

히로부미는 이후 잠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입문하여 요시다 쇼인의 밑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1859년에는 기도를 수행하여 에도로 나와 조슈 번의 저택인 유비관(有備館)에서 문무의 수업에 힘썼다. 히로부미가 청소년기에 조슈 번의 고위급 인사들과 친교를 쌓으면서 그들의 지도를 받았던 것은 이후 그의 행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존왕양이론에 심취하다
쇼인과의 만남은 이토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에도 시대 말기에는 막부의 개국 정책을 둘러싸고 각종 국론이 분출하면서 천황을 받들고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자 했던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이 고양되었는데, 쇼인은 이러한 존왕양이의 방침을 천명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쇼인은 하급 무사 출신으로 어려서는 병학을 익혔고 이후 에도에서 사쿠마 쇼잔(佐久間像山)에게 서양 학문을 배웠다. 쇼인은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 내항에 대한 막부의 외교 방침에 분노를 느끼며 존왕양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존왕론은 막부의 대외정책을 반대하며 저항하던 무사들이 적어도 근세 이전까지 핵심적인 정치적 주체였던 천황의 권위를 복원하여, 새로운 정치적 구심점으로 내세우고자 했던 주장이었다. 또한 애초에 당시 새롭게 대두하던 서구 세력의 위협에 막부가 분명한 대응을 보여주지 못하던 데 대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정치적 운동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당시 막부와 통상을 기도하던 외국 세력에 대해 배타적인 성격을 지닌 양이운동과 자연스레 결합하여 하나의 주의(主義) 내지 사상(思想)의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개항에 부정적이었던 천황의 조정(朝廷)과, 결국 서구의 압력에 굴복하여 1858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 버린 에도 막부의 입장이 갈리면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는 막부의 반대 세력이 힘을 합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막부의 반대 세력들은 이후 존왕양이를 하나의 정치적 슬로건을 내세우고 규슈로부터 교토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활동을 펼쳤으며, 이후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본격적으로 막부의 권위에 도전하게 되었다.

막부와 이들 세력은 제1차, 제2차 조슈 정벌 등 몇 차례의 충돌을 거치면서 결국, 1866년에 존왕양이 세력이 막부를 몰아내게 되는데, 이 시기에 이르면 존왕론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 사이에서는 이미 양이론이 무모한 일이라는 인식이 점차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는 데에는 히로부미를 위시한 과거 양이론의 입장에 있던 신진 세력이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쇼인이 세운 쇼카손주쿠에는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 근대 일본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다수 모여 있었고, 이들 또한 모두 쇼인의 영향 하에 강경한 양이론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히로부미 역시 여러 번의 양이론자들과 함께 행동하였는데, 특히 1862년 말에는 신사쿠, 겐즈이, 가오루 등 당시의 존왕 급진파들과 함께 에도 시나가와(品川)에 건축 중이던 영국공사관을 습격해 방화하는 행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이 일로 히로부미는 존왕양이의 대의를 밝혔다는 이유로 이듬해인 1863년 3월, 조슈 번에서 시오야토이(士御雇)라는 무사에 준하는 신분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이후 히로부미는 영국 유학을 거치면서 양이론자에서 개국론자로 그 입장을 바꾸게 된다.

영국유학과 개국론으로의 전회
양이론이 한창이던 시기 조슈 번은 군함, 대포 등 근대적인 군비 확충을 위해 서양의 학문 및 군사문제의 전문가로 유명했던 사쿠마 쇼잔을 초빙하고자 하였다. 쇼잔은 이 제안을 거절하고, 서양을 배척하는 일이 이미 불가능하며 개국에 의한 부국강병이야말로 급한 일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엔도 긴스케(遠藤勤助),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등과 함께 영국 유학을 지원하여 번의 허가를 얻었다. 1863년 5월, 히로부미 일행은 영국 상선을 타고 요코하마를 출항, 런던으로 밀항하여 영어 습득에 힘씀과 동시에 서구의 문물에 접하면서 개국론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러나 유학 약 반년 후, 신문보도를 통해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에서 외국 선박에 포격을 가한 사실과 외국 선박의 보복공격이 시도되었던 일, 사쓰마 번에서 일어난 나마무기사건(生麦事件, 나마무기 마을에서 무사들이 번주 아버지의 행렬에 침범한 말 탄 영국인들을 살해한 사건)으로 인해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에 포격을 가한 일 등을 알게 되었다. 이에 마사루와 히로부미 두 사람은 조슈 번의 무모한 양이운동을 중지시키고자 급히 귀국한다.

두 사람이 요코하마에 도착한 것은 1864년 6월, 영국과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의 4개국 연합 함대가 시모노세키 포격을 위해 출항하기 직전이었다. 두 사람은 영국공사 얼콕(Alcock, Sir Rutherford)을 만나 조슈 번의 번주에게 양이가 잘못된 일임을 설득한다는 조건으로 시모노세키에 대한 포격을 연기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얼콕은 이를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야마구치로 가서 번주인 모리 요시치카(毛利慶親)에게 세계의 정세를 설명하고 양이의 무모함을 진언하였다.

하지만 이미 양이로 기울어버린 번의 여론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결국 8월에 4개국 연합 함대의 시모노세키 포대에 대한 포격, 점거가 단행되었다. 조슈 번은 결국 굴복하였으며, 강화 논의를 위해 사자인 다카스기 신사쿠 외에도 히로부미, 마사루가 통역이라는 명목으로 수행하였다. 이 때 이들은 영국공사관원인 어네스트 사토(Sir Ernest Mason Satow)와 친교를 맺었다.

막부 토벌과 메이지 정부에서의 활약
이 무렵, 조슈 번은 막부의 제1차 조슈정벌군을 맞아 공손사죄의 태도를 취하고 굴복하지만, 곧 다카스기 신사쿠 등의 지도하에 막부에 대한 철저 대항을 목표로 하는 쪽으로 노선을 잡았다. 막부 타도를 위해서는 무기와 병장비를 근대화할 필요가 있었으나 막부에서 조슈 번의 총포와 기선의 수입을 철저히 막고 있었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궁리 끝에 히로부미와 마사루는 1865년 7월 나가사키로 향하여 사쓰마 번의 원조를 받아 영국 상인에게 대량으로 신식 소총과 기선을 구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조슈군은 1866년 6월에 벌어진 제2차 조슈정벌전에서 막부군에 압도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 사이 1866년 1월, 사쓰마 번과의 삿초연합이 성립하자 히로부미는 사쓰마 번과의 연락을 맡는 한편, 어네스트 사토와 접촉하여 그에게 일본의 주권자는 천황이며 쇼군과 동등한 권세를 가진 다수의 다이묘가 존재한다고 설명하고, 영국이 토막세력을 지지해 줄 것을 설득하였다.

1867년 3월, 히로부미는 그 때까지의 공적을 인정받아 조슈 번 번주에게 30인 부지(扶持)의 급료를 받는 정식 무사 신분을 수여받는다. 신정부 수립 이후인 1868년 1월 신정부에 임용되어 이제까지의 대외 절충 및 교섭의 경력을 인정받으면서 외국사무담당(外國事務擔當)을 맡아 본격적인 관료이자 정치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1869년 5월에는 통상사지사(通商司知事), 회계관권판사에 임명되었고, 금융제도의 정비 및 식산흥업의 면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히로부미는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정부 내의 개명파(開明派)를 형성하고, 그 일원으로서 일본 최초의 철도를 1870년 4월에 착공하여 2년 반 뒤에 개통시켰다. 1870년 말에는 다시 재정의 조사를 위해 미국 출장을 떠났고, 이후 본국에 화폐제도 개혁 의견을 상신하여 ‘신화조례(新貨條例)’의 제정에 공헌하였다. 이듬해에 귀국해서는 조세 및 조폐업무를 총괄하였고, 공부대보(工部大輔)로 승진하여 식산흥업정책 추진의 책임자가 되었다.

본격적인 정쟁(政爭)의 무대로
1871년 10월, 메이지 정부는 미국 및 유럽 각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교섭 타진과 해외 정세의 시찰을 위해서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특명전권대사로 하는 대사절단을 미국 및 유럽 각지에 파견하였다. 이 때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야마구치 나오요시(山口尚芳)와 함께 히로부미 역시 이와쿠라 도모미의 요청으로 전권부사(全權副使)에 임명되었다. 외유 중에는 이상주의적인 다카요시와 현실주의적인 도시미치의 성격 차이에 의한 양자의 의견 대립이 종종 일어났는데, 히로부미는 동향 선배인 다카요시보다 도시미치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그와 가까이 하였다.

히로부미는 1873년 9월 귀국하였는데, 당시 정부 내부는 정한론을 둘러싸고 대립과 분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 결국 참의(參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이 사직하였으며, 히로부미는 그들의 빈자리를 메워 참의 겸 공부경(參議兼工部卿)으로 영전하였다. 그리고 참의 겸 내무경(參議兼內務卿) 오쿠보 도시미치를 도와 참의 겸 대장경(參議兼大蔵卿)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께 오쿠보 전제체제를 지탱하는 중심인물이 된다.

그러나 이듬해인 1874년부터 자유민권운동이 고양되고, 거기에 대만 출병에 반대하여 참의 겸 문부경(參議兼文部卿) 기도 다카요시가 사직하면서 오쿠보 정권은 급격히 그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사직한 다카요시는 입헌정체를 주장하며 오쿠보 정권을 압박하였다. 결국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주선으로 1875년 1월 오사카에서 오쿠보 시게노부와 다카요시, 다이스케의 회담이 이루어졌으며, 입헌정체로의 점진적 이행이라는 선에서 타협을 이루었다.

1875년 3월에 다카요시와 다이스케는 참의로 복귀하였고, 4월에는 점차 입헌정체를 세운다는 조칙이 나오면서 거기에 입각해 원로원(元老院), 대심원(大審院)이 설치되고 지방관회의도 개최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오쿠보 전제체제라는 정치적 상태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므로 다이스케와 다카요시는 다시 함께 참의를 그만두었다. 이후 1877년의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정한론 대립으로 사직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가고시마에서 무사들을 이끌고 신정부군에 맞서 일으킨 전쟁)을 처리하면서 오쿠보 체제는 안정된 듯이 보였지만, 5월에 오쿠보가 암살되면서 정국은 급격한 변화를 맞게 된다.

이미 세이난 전쟁 중에 다카요시는 병사하였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멸하였다. 여기에 시게노부마저 암살당하면서 히로부미를 억제할 만한 정치적 유력자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히로부미는 곧 참의 겸 내무경이 되면서 정부 최고의 실력자에 오르게 되는데, 이 때 그의 나이가 38세였으니 젊은 나이라 할 수 있었다. 히로부미에게 유력한 라이벌이라면, 참의 겸 대장경인 오쿠마 시게노부 뿐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근대 일본 입헌주의의 향방
1876년, 입헌정체 수립의 방침에 따라서 원로원은 헌법 초안을 기초하라는 명령을 받고 1878년 6월 ‘일본국헌안(日本國憲按)’을 작성하였다. 이 초안에는 입법권을 황제와 국회로 나눈다고 하는, 소위 영국류의 자유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아 천황의 주권에 제한을 가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천황제 절대주의의 확립을 목표로, 천황의 이름하에 관료지배체제를 굳히고자 했던 히로부미와 도모미 등은 이 초안에 강하게 반대하여 결국 폐기시켰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즉시 국회 개설을 열망하는 민권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정당내각의 출현을 목표로 하는 급진적인 헌법 초안도 유포되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이와 같은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서 이와쿠라 도모미 우대신은 천황이 헌법을 흠정하고 국회 개설의 기일을 예고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고, 이 의견에 따라 1879년 12월에 각 참의로 하여금 입헌정체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토록 하였다. 각 참의는 이듬해 속속 의견서를 제출했는데, 이노우에 가오루가 국회 개설에 관해 적극적인 추진론을 언급한 것 이외에는 소극론이나 반대론이 대부분이었다.

히로부미도 역시 국회 개설은 모두 천황의 의지에 일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쿠라 도모미 우대신은 민권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정부의 지도하에 천황대권을 극도로 확대한 절대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입법권 분리를 위한 관선의 원로원과 공선(公選)의 민선원으로 이루어지는 양원제 국회 개설을 구상하였다. 시기를 읽는 데 능하였던 히로부미는 이와 같은 도모미의 구상에 따라 일을 추진하기로 한다.

그런데 다른 참의보다 늦은 1881년 3월에 간신히 의견서를 제출한 오쿠마 시게노부는, 정당내각제와 국회를 1883년부터 개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제까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협조의 자세를 취해 왔던 정부 수뇌부는, 시게노부의 급진론에 큰 충격을 받았다.

때마침 거기에 ‘개척사(開拓使) 관유물(官有物) 불하(拂下)문제’가 일어났다. 이 문제는 정부가 다액의 국비를 투입해서 경영해 왔던 공장, 탄광 등 개척사의 관유물을 사쓰마 번 출신의 참의겸개척장관인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清隆)가 부당하게 싼 가격으로 같은 번 출신인 정치상인 고다이 도모아쓰(五代友厚) 등이 경영하는 관서무역상회(關西貿易商會)에 팔아넘길 것을 강경하게 주장하여 각의 결정으로 통과시킨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시게노부를 비롯하여 정부 내부에서도 반대론이 강경하였고, 민간에서도 번벌 전제주의의 행태를 공격하는 목소리가 맹렬하게 제기되었다.

이 사건으로 구로다 기요타카 등 사쓰마 번 출신의 참의는 시게노부에게 강한 적의를 품었고, 히로부미 역시 라이벌 시게노부에게 세상의 인기가 집중되는 데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삿초 번벌 정권의 확립을 위한 결속을 굳힘과 동시에 시게노부를 내각에서 추방하고자 하는 책동이 진행되었다. 1881년 10월, 히로부미를 비롯한 번벌 세력은 개척사 관유물 불하가 중지된 것을 계기로 하여 시게노부의 참의 면직을 결정하였다.(메이지 14년의 정변) 아울러 오쿠마 시게노부에 대한 면직으로 여론이 악화될 것을 염두 하여 10년 후인 1890년에 국회를 개설하겠다는 조칙을 같이 내면서 여론을 진정시키고자 하였다.

‘메이지 14년의 정변’ 이후의 번벌 정치 강화는 주로 히로부미가 주도하였다. 히로부미는 이와쿠라 도모미의 구상에 따라서 헌법 제정, 국회 개설과 같은 일본 근대 정치사상 주요 사건들의 방향을 지정하고 진행시켰다. 먼저 헌법 제정을 준비하기 위해서 서구 국가들의 헌법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심복인 이토 미요지(伊東巳代治), 히라타 토스케(平田東助),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등을 동반하여 1882년 3월 유럽으로 건너갔다.

당시는 이미 이타가키 다이스케의 자유당(自由黨), 오쿠마 시게노부의 입헌개진당(立憲改進黨)이 결성되면서 자유민권운동이 점차 고양되고 있던 시기였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히로부미는 후쿠지 겐이치로(福地源一郞) 등을 표면에 내세워 어용정당으로서 입헌제정당(立憲制定黨)을 결성시켰는데, 여론에 역행한 이 정당은 당세가 미약하였기에 히로부미의 기도는 실패하였다.

히로부미는 유럽에 도착하자 곧장 독일로 향하였다. 그 이유는 신흥 독일제국에서는 국회를 제어하는 국가주의적 헌법이 시행되면서 ‘철혈재상’으로 일컬어진 비스마르크의 지도하에 국운의 융성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독일의 모델이 일본의 향후 입헌체제에 좋은 모범이 될 것이라 여긴 것이다. 히로부미는 비스마르크의 조언과 그나이스트(Rudolf von Gneist), 슈타인(Lorenz von Stein) 등 헌법학자들의 강의와 설명을 듣고, 일본의 헌법에 관한 구상을 세운 다음 이듬해 8월에 귀국하였다. 히로부미는 자유주의적인 입헌군주제인 영국의 정치체제 등은 일본의 ‘국체(國體)’에 반한다는 이유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
이토가 귀국하기 직전에 이와쿠라 도모미 우대신이 병사하면서 그는 문관 관료 최고의 실력자가 된다. 또 천황의 절대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하여 메이지 정계 제1인자로서의 지위도 굳혔다. 히로부미는 1884년 3월, 제도취조국(制度取調局)을 설치하여 이노우에 고와시, 이토 미요지,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郎) 등 심복을 소속 관료로 두고 스스로 국장에 취임하면서 궁내경(宮內卿)까지도 겸임하여 정부와 궁중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동시에 화족령(華族令)을 공포하여 1869년에 제정된 구 쿠게(公家), 다이묘(大名)의 화족 및 그 이외에 메이지 신정부 수립 이후에 공훈이 있는 자들을 새롭게 화족에 더하면서 이들을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5작으로 나누었다.

즉 봉건적인 귀족 외에 문무의 관료 귀족을 더하고, 정치적 특권 계급을 창출하여 이후 국회를 개설할 때에 귀족원의 주요한 구성원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히로부미 스스로는 백작에 추서되었다. 이어서 1885년 12월 22일, 다년에 걸쳐 메이지 정부를 구성하고 있던 태정관제를 폐지하고 내각제도를 창시하여 스스로 초대 총리대신이 되면서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의 나이 45세 때의 일이다.

히로부미는 태정관제 폐지와 함께 여타 기관과는 격을 달리하는 궁내성을 두어서 정부를 궁정으로부터 독립시켰다. 바꾸어 말하면 천황의 통치를 궁내성에 묶어놓은 것이었다. 또한 구 귀족들을 모두 정치의 장에서 물리치면서 관료 지배체제를 강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히로부미는 명실상부하게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토의 눈부신 출세를 보며 인정하면서도 믿기지 않아 했다. 단지 무사 신분만이라도 되기를 원하였던 그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그야말로 상상하기 힘든 일이 이루어진 셈이다.

히로부미는 1886년부터 헌법 초안의 기초에 착수하였다. 이노우에 고와시(井上毅)가 내각 고문인 독일인 공법학자 뢰슬러(Hermann Rӧsler)의 조언을 들으면서 기초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토 미요지, 가네코 겐타로가 여기에 협력하였다. 민간의 반대론을 두려워하여 작업은 극비리에 진행되었고, 1888년 봄에는 최종 초안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토 내각은 무너지고, 구로다 기요타카 내각이 성립하였다. 히로부미가 천황의 권위를 빌어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것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고, 또 이토 내각의 외무대신에 취임하였던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약 개정을 서두르면서 굴욕적인 녹명관(鹿鳴館) 시대1)를 전개한 데 대해서, 정부 내외로부터의 비난이 쏟아지면서 국민적인 반정부운동이 열기를 더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토 내각이 무너진 4월 30일, 천황의 최고 고문기관으로 추밀원(樞密院)이 신설되면서 히로부미는 그 초대의장에 취임하였다. 이것은 궁중의 기관임과 동시에 국회에 대해서는 번벌 관료 정부의 방벽 역할을 하면서 때로는 정부의 정책에 규제를 가하는 등, 일본 입헌정치의 건전한 발달을 크게 저해하는 것이었다.

원로(元老)의 탄생과 정치 관여
추밀원에서는 헌법 초안의 심의가 진행되었고, 히로부미는 의장으로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1889년 2월 11일, 대일본제국헌법이 발포되었다. 헌법발포 식전(式典)은 히로부미에게도 중요한 무대였다. 이 헌법에서 천황의 대권은 다른 입헌군주국에서는 그 예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인정되었고, 천황의 그 인자함에서 국민에게 수여한다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

또 황위의 계승이나 섭정에 대한 것 등 황실제도에 대해서는 일체 헌법 조문에는 나오지 않고, 헌법과 동시에 제정된 황실 전범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이것은 황실제도를 완전히 국회의 관여 바깥에 두고자 한 이와쿠라 도모미의 구상을 계승한 히로부미의 생각에 기초한 것이었다. 헌법 제정을 추진한 히로부미의 헌법 해석은 이와 같이 외견상의 입헌주의에 그치고 있었다. 그는 천황에 대해서만 책임을 갖는 정부는 정당 세력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초연한 존재라고 주장하며 의회를 무시할 준비를 갖추었다.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이후에 구로다 내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내각, 마쓰카타 마사요시(松方正義) 내각과, 조슈, 사쓰마 번벌의 거물들에 의해 정권의 돌려먹기가 이어졌는데, 이들 모두 소위 초연주의(超然主義)의 방침을 취하면서 국회의 다수의견을 무시하거나 탄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이후 구로다 내각에서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의 조약 개정안이 여론의 공격을 받자, 히로부미는 일찌감치 추밀원 의장직을 사임하며 시게노부 반대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후 구로다 내각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지만, 1889년 11월 1일에 히로부미와 구로다 기요타카는 나란히 원훈(元勳)의 대우를 해 준다는 칙어를 받았다. 소위 ‘원로의 탄생’인 셈이었다.

이어지는 1890년에 제국의회가 개설되자 히로부미는 귀족원 의원이 되면서 초대 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듬해 6월에는 다시 추밀원 의장에 임명되었지만, 마쓰카타 내각의 선거 간섭에 불만의 뜻을 표명하면서 1892년 2월, 추밀원 의장을 그만두고, 스스로 천황 주권을 옹호하는 대정당을 조직하여 민권파의 정당을 억제하고자 하는 취지의 상주를 올린다.

그러나 그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의 맹렬한 반대와 천황의 뜻으로 의장 사의 의사를 철회하였다. 어용정당조직의 구상이기는 하나, 이제까지 그가 견지하던 초연주의적 태도에 비하자면 그의 정당관(政黨觀)의 큰 전환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동시에 히로부미가 본래 지녔던 약간의 개명성과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보수반동적인 성격의 대립이 이 무렵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히로부미는 결국 이 해 8월에 마쓰카타 내각의 뒤를 이어 제2차 내각을 조직하고 두 번째 총리대신 자리에 오른다. 이후 히로부미는 해군 확장과 지조증징(地租增徵, 토지세 징수를 늘리는 것)을 단행하였고, 조약 개정을 성공시켰으며, 청일 전쟁을 수행함과 동시에 전권대사로서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어 청나라와의 강화를 성립시켰다. 이러한 공적들로 인해 히로부미는 다시 후작으로 승진하였다.

청일 전쟁 이후, 히로부미는 점차 초연주의적인 태도를 포기하고 정당과의 타협을 통해서 정무의 원활한 운영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 때문에 1896년 3월 자유당의 이타가키 다이스케를 내무대신으로 맞이하지만, 이것이 정당을 적대시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아리토모가 다년간 육성해 온 중앙, 지방에 걸친 관료군의 반발을 초래하게 된다. 이윽고 내각 총사직으로 이어지면서 두 번째 총리대신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때까지 관료계의 왕좌를 점하던 히로부미의 지위가, 육군을 배경으로 하여 귀족원이나 내무 관료 안에서 그 세력을 넓혀왔던 아리토모에 의해 본격적으로 위협받게 된 것이다. 1898년 1월에 히로부미가 다시 총리대신이 되면서 제3차 이토 내각이 성립하지만, 정당의 공격과 야마가타의 모략에 의해서 겨우 반년 만에 다시 무너진다. 갑작스러운 경험으로 히로부미는 헌정의 운영을 위해 스스로 정당을 조직할 의사를 표명하고, 번벌 관료에 의한 절대주의의 재건을 목표로 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과 이제 표면적으로도 대립하게 되었다.

정당정치의 시도와 중앙정치무대로부터의 퇴장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된 히로부미는 구 자유당계의 정당인을 중심으로 사이온지 긴모치, 가네코 겐타로 등 직계의 관료들과 함께 1900년 9월 입헌정우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그 총재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정우회는 히로부미에 의해 독재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근대적 정당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단지 국회 대책의 방편으로써 조직된 데 지나지 않았다. 정우회 결성 직후, 제2차 야마가타 내각의 뒤를 이어 다시 히로부미가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면서 성립하게 된 제4차 이토 내각은, 대부분의 각료를 정우회의 회원들이 점하게 되었다.

귀족원에 의한 야마가타 계열의 의원들은 지조증징안 등에 대해서 이토 내각에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히로부미는 귀족원을 이끄는 천황의 칙어에 의해 간신히 난국을 타개하였으나, 얼마 후인 1901년 5월에 다시 총사직하게 되었다. 제4차 이토 내각 이후에는 가쓰라 타로(桂太郎) 내각이 성립하였다. 원로 이외의 인물을 수반으로 하는 최초의 내각으로, 그 배후에는 야마가타 계열의 문무관료 세력이 있었다.

한편 삼국간섭(三國干涉,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에 대해 러시아 · 독일 · 프랑스 3국이 일본의 철수를 요구하여 관철시킨 사건) 이후 러시아가 남하 정책을 본격화하면서 히로부미는 만주와 한국에서 일본의 이권 탈취에 대한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히로부미는 러시아와의 외교관계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었다. 당시 4차 이토의 내각의 뒤를 이은 가쓰라 내각은 야마가타의 영향 아래 영국과 동맹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고 한국과 만주를 침략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히로부미는 영국과 동맹하는 것이 도리어 러시아를 자극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1901년 9월 일본을 출발하여 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 여행의 주된 목적은 러시아에서 러 · 일 협상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러시아에 도착한 이토는 러시아 외상 람스도르프(Vladimir Lamsdorf)에게 만주에서 러시아의 활동을 일본이 묵인하는 대신 한국에서의 일본 지배를 보장하라는 타협안을 제시하였지만 러시아가 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협상에 실패한다. 결국 1902년 영일동맹이 결성되었으며, 일본은 한국, 만주의 식민지 지배를 놓고 러시아와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903년 히로부미는 아리토모 등 원로들과 어전회의에서 러시아와의 교섭 재개를 다시 한 번 더 주장, 관철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아리토모는 자신의 파벌 직계인 가쓰라와 상의하여 메이지 천황에게 히로부미에 대한 칙어를 내리게 하여 히로부미가 추밀원 의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하였다. 따라서 히로부미는 스스로 조직한 정우회를 포기하고 총재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후계 총재로는 사이온지 긴모치가 그 자리를 이었다. 이렇게 히로부미는 중앙 정계의 주역에서 물러나고, 대신 아리토모의 정치 노선이 점차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한국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의 여순 기습을 시작으로 러 · 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발생하자 그해 3월 히로부미는 한국을 확실히 단속하고자 국왕 위문 특파대사로 임명되어 대한제국 황제를 배알하고 일본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히로부미의 영향으로 한국은 5월에 이르러 러시아와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게 되었다.

여순 전투 승리와 황해 전투, 대한해협에서의 러시아 함대 전멸 등 일본의 우세로 전세가 유리하게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 경제상 국력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던 히로부미는 미국에 파견사절로 가 있던 가네코 겐타로에게 정보를 수집하면서 전쟁 종식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루즈벨트의 알선으로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에 대한 담판이 열리게 되자 가쓰라 타로 수상은 그 전권위원으로 이히로부미와 고무라 외상을 추천하였다.

그 결과 여순 및 대련과 그 부근의 조차권(租借權)은 청나라 정부의 승낙하에 러시아에서 일본에 양도할 것, 장춘 · 여순 간의 철도에 대한 권리도 청나라 정부의 동의하에 일본에 양도할 것이 결정되었고, 사할린 남반부 역시 할당받는다. 그리고 한국에서 일본의 우월한 지위가 보장되었다. 러 · 일 강화조약 제2조에서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에서 정치, 군사, 경제상의 우월한 지위를 갖는 것을 인정하고, 일본이 한국에 대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보호 및 감리의 조치를 취할 경우 이를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러 · 일 전쟁 강화조약이 끝나자 히로부미는 1905년 10월 한국 왕실위문 특파대사로 임명되어 수행원 쓰즈키 게이로쿠(都筑馨六) 등을 데리고 와서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는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일본의 관할하에 두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초대 통감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만년에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기초를 다지는 데에 종사하였던 것이다. 1907년 8월에 히로부미가 동경으로 돌아왔을 때는 마치 개선장군과도 같은 환영을 받고, 곧 공작으로 승진하였다. 히로부미에게 있어서 최후의 영광의 무대였던 것이다.

사망
1909년 이토는 정부 및 사이온지 긴모치 등의 권고로 통감을 그만두고 네 번째 추밀원 원장이 되었다. 그 무렵 일본의 만주 경영은 순조롭지 못한 상태로, 거기에 미국의 아시아 진출 기세가 왕성해지면서 청나라와 미국 간의 동맹설마저 유포되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토는 미국의 만주 진출에 대처하기 위해 하얼빈(哈爾濱)을 목적지로 하는 만주 시찰에 나서게 되었다. 이 시찰의 주요한 목적은 1907년 7월 만주를 양분하기로 한 러 · 일 제1차 협약을 더욱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물론 이 제안은 만주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한 것이었고, 그는 하얼빈에서 러시아 재무장관과 회담할 예정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아침, 하얼빈 역에 도착한 히로부미를 맞이하는 러시아군대의 열병식이 끝나고 일본인 환영자 인파에 접하는 순간, 의장대 뒤쪽에서 한국 의병 참모 중장 안중근의 저격이 있었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종1위(從一位)에 서품되었고, 그의 장례식은 히비야(日比谷)공원에서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진 후, 도쿄 오오이초(大井町)에 묻혔다. 당시 나이 69세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근대 일본 건설과 한국 병탄의 기초 구축한 정치가 (일본 관료, 김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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